1956년 9월 28일. 서울 시공관에서 민주당 전당대회가 열리고 있었다. 오후 2시38분쯤, 민주당 소속 장면 부통령이 연설을 마치고 단상에서 내려오던 중 갑자기 요란한 총소리가 장내에 울려퍼졌다. 민주당원을 자칭하는 김상붕이 장면을 향해 쏜 총소리였다. 왼손에 총탄을 맞은 장면은 피를 흘리면서도 다시 단상으로 올라가 “나는 무사하다”며 주위사람들을 안심시켰다. 장내는 만세와 박수로 뒤범벅이었다.
김상붕은 몇 걸음도 달아나지 못하고 민주당원들에 붙잡혀 곧 대회장으로 찾아온 김종원 치안국장에게 넘겨졌다. 김상붕이 조사에서 민주당 성동지구당 간부 최훈이 자신에게 권총을 전해주었다고 밝혀 최훈도 구속됐으나 최의 함구로 더 이상의 배후가 드러나지 않자 경찰은 민주당 내부 알력에 의한 사건으로 일단락지었다. 그러나 이듬해 1월 1일, 최훈의 처가 사건 담당 검사 앞에 나타나면서 얽혔던 실타래가 조금씩 풀리기 시작했다. 최훈의 처는 남편이 구속된 후 전 성동서 사찰주임 이덕신으로부터 수 차례에 걸쳐 30만 환 정도를 생활보조비로 받았다는 것이다. 경찰은 이덕신을 체포하고 수사를 확대했으나 이덕신 역시 입을 다물었다. 결국 경찰은 이덕신 이상의 배후조종자가 없는 것으로 단정하고 수사를 종결했다. 그러나 법정에서 이덕신이 고위경찰의 이름을 밝히는 바람에 수사는 또다시 원점으로 돌아갔다.
1월 7일의 공판정에서 최훈이 “치안국장 김종원이 배후로 생각된다”고 증언함으로써 법정으로 끌려나온 김종원이 판사와 검사에게 오히려 큰 소리를 치는 기이한 일도 벌어졌다. 김종원은 법정모욕죄로 퇴정당했다. 대법원은 김상붕·최훈·이덕신에만 사형선고를 내렸으나 4·19후 또 다른 배후자가 폭로돼 사건은 그야말로 점입가경이었다. 이번에는 김종원이 전 서울시장 임흥순을 배후자로 지목한 것이다. 임흥순은 다시 이기붕의 지시에 따른 것이라고 밝혀 책임을 이미 죽고 없는 이기붕에 떠넘겼다. 결국 이기붕→임흥순→김종원과 몇 단계의 중간 과정을 거쳐 이덕신→최훈→김상붕이 범행을 저지른 것으로 결론이 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