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8년 10월 22일, 일제강점기의 친일 부역자를 단죄하고 국가의 기강을 바로잡기 위한 ‘반민특위(反民特委·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가 국회에 설치되고 이튿날 10명으로 구성된 위원회가 처음 소집됨으로써 반미특위가 정식 발족됐다. 9월 22일 법률 제3호로 국회 반민족행위처벌법 기초특별위가 제정·공포한 ‘반민족행위 처벌법’이 발족의 근거였다. 위원은 각도 출신 국회의원들에서 선임하고 위원장은 임시정부 출신 김상덕 의원이 맡았다.
반민특위는 첫 위원회에서 김병로 대법원장을 재판관장으로 한 특별재판관 15명과 권승렬 검찰총장을 정점으로 하는 특별검찰관 9명 등으로 진용을 갖춘 뒤 1949년 1월 5일 공식 업무를 개시했다. 한때 영화와 권세를 누렸던 인물들이 민족 정기의 이름 앞에 속속 쇠고랑을 찼다. 1월 8일 화신재벌 박흥식 검거를 필두로 최린, 노덕술(일제 고등계 형사), 이광수, 최남선 등이 차례로 검거됐다.
그러나 특위는 출범 초부터 친일 세력의 강한 반발에 부딪쳐 난항을 겪었다. 친일 세력들이 암살 위협 등 온갖 수법을 동원해 활동을 방해한 것이다. 이들은 반민특위를 빨갱이 집단이라고 몰아 붙였다. 관제성 데모도 끊이질 않았다. 이승만 대통령도 노덕술이 체포되자 석방을 종용하는가 하면 수 차례의 담화를 통해 특위 무력화를 방조하거나 심지어는 앞장서는 듯한 태도를 보였다. 이 와중에 특위에서 왕성한 활동을 벌이던 소장파 의원들이 주로 연루된 ‘남로당 국회프락치사건’이 발생하자 6월 6일 경찰이 특위 사무실에 난입함으로써 특위 활동에 제동이 걸렸다. 결국 특위는 1949년 8월 31일 조사대상 682명 중 221명만을 기소하고 활동을 끝냈다. 이 중 12명이 실형을 선고받았으나 5명은 집행유예, 나머지 7명도 형집행정지 등으로 석방됨으로써 친일파 단죄는 흐지부지 넘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