찰리 채플린(1889~1977)은 런던 슬럼가의 3류쇼 출연자를 부모로 둔 탓에 8세 때부터 무대에 서야했다. 무대를 떠나서는 점원, 병원 보조원, 인쇄공 등을 전전했다. 그래서 그의 영화에서는 시대의 가난이 짙게 묻어난다. 채플린이 미국 땅을 처음 밟은 것은 할리우드가 막 영화도시로서의 틀을 갖춰가던 1913년이었다. 영화제작자 맥 세네트의 눈에 띠어 할리우드에 진출한 채플린은 1914년 1월 첫 영화 ‘생계’에 출연했으나 주목을 끌지는 못했다. 두 번째 영화 ‘베니스의 어린이 자동차 경주’는 채플린의 탄생을 알리는 예고편이었다. 몸에 꽉끼는 웃옷과 헐렁한 바지, 우스꽝스런 콧수염에 찌그러진 중절모를 쓴 채 지팡이에 의지하는 그의 ‘초라한 신사’ 이미지가 이 영화에서 처음 등장했기 때문이다. 점차 그의 영화는 ‘울리는 희극’과 ‘웃기는 비극’을 넘나들었다.
채플린은 1919년 페어뱅크스, 그리피스 등과 함께 영화사 ‘유나이티드 아티스츠’를 설립하고 1920년 첫 장편영화 ‘키드’를 제작했다. 이후 ‘황금광 시대’(1925년) ‘시티 라이트’(1931년) ‘모던 타임즈’(1936년) ‘위대한 독재자’(1940년) 등을 선보이며 왜 채플린이 위대한지를 증명해보였다. ‘모던 타임즈’에서 보듯 주로 노동자와 가난한 사람들의 우울한 상태를 묘사하는 그의 영화적 진보성은 매카시즘이 기승을 부리던 전후의 미국에서 공산주의자로 몰리기 십상이었다. 실제로 ‘비미국적인 활동’으로 기소된 적도 있었다. FBI 국장 에드거 후버는 그에게서 감시의 눈을 떼지 않으며 그가 미국에 거주하지 못하도록 온갖 노력을 기울였다.
1952년 9월, 채플린이 ‘라임 라이트’ 상영을 위해 영국으로 건너가자 후버는 그의 재입국을 허가하지 않도록 이민국과 협상했다. 결국 9월 19일 미 정부는 채플린의 입국을 불허하는 것으로 결정했다. 채플린도 그때까지 영국 국적을 포기하지 않고 있었다. 그가 다시 미국으로 돌아온 것은 1972년 아카데미 특별공로상을 받을 때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