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0년 9월 17일 새벽 6시. 김구 주석을 비롯한 임시정부 간부들과 한·중(韓·中) 양측 인사 200여 명이 중국 충칭의 가릉신로 18번지에 있는 가릉빈관에 모여있었다. 식장 입구에 걸린 대형 태극기와 청천백일기가 손님들을 맞았다. 이윽고 김구 주석이 선언문을 읽어 내려가고 뒤이어 조직 구성이 발표됨으로써 이국땅이긴 하나 마침내 임시정부도 21년 만에 자체 무장 군대를 갖게 됐다. 광복군이 출범한 것이다. 1907년 대한제국 군대가 해산되고 33년 만에 맞는 가슴벅찬 감격의 순간이었다.
총사령관에는 지청천이, 참모장에는 이범석이 임명됐다. 12명의 장교에 병력이라곤 30여 명에 불과한 초라한 출발이었지만 부대원들 얼굴에는 결의가 넘쳐났다. 1년 뒤 300명, 2년뒤 340명으로 완만한 증가세를 보이는 가운데에서도 광복군은 눈부신 활약을 펼쳐 대일 선전포고(1941년)를 하고, 영국군에 파견돼 인도·버마 전선에 투입(1943년)됐으며, 미국 전략정보기구(OSS)와 합작해 국내진공을 위한 특수훈련(1945년)을 받았다.
그러나 조국이 없는 군대의 현실은 언제나 설움뿐이었다. 창설 2개월 만에 본부를 시안, 2년 뒤에는 다시 충칭으로 옮겨야했고, 1941년 11월부터는 중국 정부의 원조를 받는 조건으로 중국군 참모총장의 지휘를 받아야 했다. 1945년 4월에 이르러서야 중국군의 영향권으로부터 벗어났지만 곧 광복이 찾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