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철은 항일 독립외교의 선구자였고 을사오적 처단에 나섰던 의사였으며 대종교를 창시한 종교인이었다. 이처럼 나철은 우리 근대사에 큰 발자취를 남겼는데도 역사에서는 거의 무명인사에 가까울 정도로 홀대를 받아왔다. 항일 무장투쟁, 임시정부를 통한 외교투쟁, 민족정신을 고취시키는 문화투쟁의 한 가운데에는 언제나 선생이 창교한 ‘대종교’가 있었다. 박은식, 신채호, 정인보, 최남선 등의 거목들이 대종교인이었다는 점을 감안하면 대종교의 위상이 어떠했는가를 짐작할 수 있다.
나철은 1863년 전남 보성에서 태어나 과거에 급제하고 징세서장(현 국세청장) 자리에까지 올랐으나 나라가 기울자 모든 공직을 사퇴하고 항일운동에 뛰어들었다. 4차례나 일본을 방문해 그들의 각성을 촉구했으나 반응이 없자 천황 궁성 앞에서 3일간 단식을 벌였고, 을사조약 체결 후에는 오적 처단을 계획했다. 1906년 정월 초하루와 이듬해 3월에 오적을 처단하려다가 실패하는 바람에 유배 10년형을 선고받고 무안군 지도로 유배됐다.
고종의 특사조치로 4개월만에 풀려난 그는 무력투쟁이 효과가 없음을 깨닫고 정신운동으로 방향을 바꿨다. 고려 때 원나라에 의해 말살됐던 왕검교를 700여 년만에 부활시켜 1909년 단군교로 개명하고 민족 종교운동의 구심점으로 삼았다. 그러나 일제가 단군을 국조로 모시는 단군교를 항일독립단체로 규정하자 선생은 단군교를 대종교로 바꿔 탄압을 비껴가는 지혜를 보였다. 일제는 대종교 교세가 급격하게 증가하자 당황해 1915년 ‘종교 통제안’을 공포하고 대종교를 불법화시켰다. 결국 순교냐 수도냐의 갈림길에 선 나철은 1916년 8월 한가위날(양력 9월12일) 구월산 삼성사에서 방문을 잠그고 순교의 길을 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