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 오늘

중국의 마오쩌둥 사망

1921년 7월 1일, 13명의 대표가 참석한 가운데 상하이 프랑스 조계의 한 여학교에서 중국 공산당이 창당됐다. 멤버 중에는 당시에는 크게 주목을 끌지는 않았지만 훗날 중국 공산당의 운명을 결정하게 될 젊은이 한 명이 끼어있었다. 정강산 근거지에서의 농민자위군 결성(1927년)과 강서 소비에트 임시정부 수립(1931년)을 거쳐 고난의 대장정(1934년)까지 성공시켜 마침내 1949년에 중화인민공화국을 뿌리내리게 한 ‘중국혁명의 아버지’ 마오쩌둥(毛澤東)이었다.

마오는 중국 인민들을 제국주의와 봉건적 군벌의 압제에서 끌어내고 중국을 통일한 인물이었지만 혁명을 완수하고 나서의 아집과 독선은 중국의 현대화에 질곡으로 작용했다. 개인숭배 기운은 1958년 시작된 대약진운동에 이르러 절정을 이뤘다. 마오는 점차 주변의 과잉충성과 자기 스스로에 갇혀 현실과 유리되어갔다. 어느덧 중국은 ‘마오 만세’에 탐닉해 있었고 마오는 전지전능한 하느님이 됐다. 대약진운동의 실패로 국민들이 기아선상을 헤매고 있었으나 아무도 마오에 이의를 달지못했다. 반복되는 경제 실패와 획일적인 관료주의, 빈부격차 심화와 지식인들의 우경화로 궁지에 몰리게되자 마오는 자신이 평생을 바쳐 이룩한 혁명이 이대로 무너질지도 모른다는 막연한 불안감에 또다시 무리한 반격을 꾀했다. 문화대혁명이었다.

문화혁명이 휩쓸고간 1965~1976년 사이의 중국은 암흑기 그 자체였다. 1976년 9월 9일 마오가 죽은 후에도 중국은 자칫하면 대혼란과 내전에 빠질 뻔했다. 강청 등 4인방과의 맞대결에서 주자파(走資派)로 지목된 덩샤오핑이 패했다면 분명 빠르게 질주하는 현재의 중국을 기대하기란 요원한 일이었다. 마오의 죽음과 함께 무대 뒤에서는 권력을 둘러싸고 위기가 고조되고 있었다. 결국 10월 6일 4인방이 전격 체포됨으로써 덩샤오핑의 복권과 함께 중국은 찬란한 21세기를 맞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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