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방 후 북한은 김일성이 사실상의 모든 권력을 장악해 놓고도 통일정부 수립이란 명분을 내세워 공식적으로는 정부 수립을 차일피일 미뤄왔다. 1948년 8월에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자 김일성은 비로소 정부 수립을 위한 수순을 밟았다. 첫 작업은 1948년 8월 25일 치러진 최고인민회의 대의원 선거였다. 우리의 총선과 다른 점은 후보자를 선택하는 방식이 아니라 미리 정해진 후보자에 대해 찬반을 표시하는 형식이었다. 공개투표인 흑백함 선거였던 탓에 유권자 452만 명 중 99.7%가 투표에 참가하고 98.49%가 찬성했다.
이런 과정을 거쳐 선출된 212명의 대의원과 남쪽 대의원 360명으로 구성된 제1기 최고인민회의가 9월2일 평양 모란봉극장에서 개막됐다. 그해 7월 남로당의 주도로 비밀리에 선출된 남쪽 대의원은 남쪽 의견까지 수렴했다는 주장을 내세우기위한 명분쌓기용이었다. 그러나 순조롭던 작업은 곧 암초에 부딪혔다. 내각의 수상은 김일성으로, 부수상 3명은 남로당의 박헌영, 홍명희와 북로당의 김책으로 쉽게 결정됐지만 내각 구성을 둘러싸고 남·북로당 간에 첨예한 갈등이 빚어졌기 때문이다.
숫적으로 열세인데다가 요직마저 북로당에 빼앗기게 되자 남로당은 모든 게 불만스러웠다. 이 갈등은 정권수립 후까지도 계속돼 결국 남로당계의 몰락을 재촉했다. 최고인민회의 5일째인 9월 8일 인민공화국 헌법이 승인·공포되고 9월 9일 오전10시 김일성이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수립을 선포했다. 남과 북의 서로다른 평행선이 시작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