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4년 2월 8일 일본이 중국 뤄순항의 러시아함대를 선제공격하면서 시작된 러일전쟁은 이듬해 1월 일본이 난공불락의 뤄순요새를 함락하고 그해 5월 러시아의 발트함대마저 대한해협에서 격파하면서 사실상 내리막길을 걸었다. 일본의 러·일전쟁 승리는 전 세계에 충격이었다. 서양이 동양에 패배한 것은 징기스칸의 유럽 침공 이후 처음이었다.
그러나 전쟁이 막바지에 다다르면서 일본은 더이상 전쟁을 치를 수 없었다. 전사자·병사자가 8만 여명인데다 부상자·발병자도 38만 여명을 헤아렸기 때문이다. 재정도 거의 파탄 상태였다. 그때 루스벨트 미 대통령이 강화 중재자로 나섰다. 러시아 역시 그해 1월 일어난 ‘피의 일요일’ 사건으로 민심이 흉흉한데다 발트함대마저 궤멸당해 민심 수습을 필요로 했다. 미국을 비롯한 열강들도 일본이 러시아를 완패시켜 극동의 균형이 깨지는 상황을 최악으로 여겼다.
협상은, 일본의 전권대사 고무라 주타로와 러시아의 전권대사 비테가 참석한 가운데 1905년 8월 10일 미국 뉴햄프셔주의 포츠머스항에서 시작되어 17차례 진행됐다. 비테의 외교수완은 탁월했다. 그는 일본과의 협상에는 당당하게 임하되 미국의 언론에 세심한 주의를 기울였다. 점차 미국의 신문들이 그에 대해 호의적으로 쓰고 미 국민들이 러시아를 동정적으로 생각하기 시작했지만 일본 대표는 비밀주의와 우울한 태도를 보여 대조를 이뤘다. 비테가 협상장에서 “이 자리에는 승전국도 패전국도 없다”며 강경한 태도를 취해도 일본으로서는 더 이상의 전쟁 수행능력 부족으로 마땅한 대응안을 찾지 못했다.
비테가 니콜라이 황제의 훈령을 지키지 않은 것은 회의 최종일에 양보한 사할린 남부 할양 뿐이었다. 일본은 애초에 배상금으로 요구한 12억 엔은 커녕 1엔도 받지 못했고 일본이 점령했던 사할린도 북쪽의 반을 내주어야 했다. 9월 5일 체결된 포츠머스 조약으로 승전국 일본이 얻어낸 것은 조선에서의 배타적 우월권과 요동반도 조차권, 그리고 사할린 섬 남부가 전부였다. 막대한 희생을 치른 승리의 대가 치고는 허망한 결과였다. 다만 배상금은 없었지만 사할린섬 남쪽, 뤼순·다롄의 조차권, 창춘 이남의 철도부설권을 할양받은 것으로도 일본에는 적지않은 전리품이었다. 특히 조선에 대한 지배권을 인정받은 것이야말로 최대 수확이 아닐 수 없었다.
그러나 전쟁 기간 고통을 감내했던 일본 국민들은 조약안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11가지나 되는 비상특별세에 물가고까지 겹쳐 숱한 고통을 겪으면서도 일본 정부의 ‘연전연승’ 선전만을 믿고 승리의 날을 기다렸는데 배상금이 한 푼도 없다는 회담 결과에 국민들은 격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언론은 “굴욕적인 조약” “참을 수 없는 비분강개” 등의 제목을 달아 국민들을 자극하고 선동했다.
분노는 조약 체결일인 9월 5일에 폭발했다. 도쿄 히비야(日比谷) 공원에서 열린 강화조약 반대 국민대회를 마친 수 만 명의 시민들이 폭도로 돌변, 정부계의 신문사, 경찰서와 파출소, 내무대신 관저 등 200여 곳의 공공시설을 파괴하거나 불태우고 전차도 16대나 불지른 것이다. 결국 군대에 의해 진압됐으나 17명이 사망하고 2000여 명이 체포됐으며 2000여 명이 다쳤다. 그래도 루스벨트는 이 조약으로 1906년 노벨평화상을 수상했고 열강들은 일본과 러시아의 절묘한 세력 균형을 맞출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