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 오늘

박열 열사, 애인 가네코와 함께 일본에서 구속

무정부주의를 통해 항일운동을 벌였던 박열 열사가 일본인 애인 가네코 후미코(金子文子)와 함께 구속된 것은 1923년 9월 3일이었다. 히로히토 일본 왕세자 결혼식 때 천황 부자를 폭살하려 했다는 것이 혐의였지만, 조작설도 끊이질 않았다. 박열은 자신이 결성한 비밀결사 조직 ‘불령사(不逞社)’의 한 회원에게 폭탄을 의뢰한 것이 발각되어 가네코와 함께 재판에 회부되었으나 전혀 주눅들지 않고 당당한 모습으로 재판에 임했다.

그는 “한복 착용을 허락하고, 조선어를 사용할 수 있도록 통역을 준비할 것이며 피고인 좌석을 일본인 판사 좌석과 동등하게 해 줄 것” 등을 요구했고, 가네코는 “한국 이름 ‘금자문자’로 불러달라”고 했다. 수감 중 가네코가 박열의 무릎에 앉아 책을 읽고 있는 수감 모습이 담긴 ‘괴사진’이 일본 정계, 재계, 군부, 신문사 등에 전달되어 “사법사상 전례가 없는 옥중결혼”이라며 일본 전역에 소란이 일기도 했다.

1926년 3월 25일 두 사람 모두 사형선고를 받았다가 곧 무기로 감형됐지만 가네코는 7월 23일 목매어 자살했다. 사형선고 때도 “박열과 자신을 한 교수대에 매어 달라”던 당찬 여자 가네코는 결국 뜻을 이루지 못한 채 박열의 고향 경북 문경의 선산에 묻혔다. 박열은 일제가 패망한 후인 1945년 10월 석방되어 1948년 귀국했다가 6·25 때 납북되었다. 그리고 1974년 1월 17일, 72세로 북한에서 숨져 애국열사능에 묻혔다. 22년 2개월을 차가운 일본 감옥에서 갇혀 지냈던 파란많은 인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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