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3년 9월 1일 오전 11시58분44초. 그때까지 일본인이 경험하지 못했던 대재앙이 일본 간토(關東)지방을 강타했다. 매그니튜드 7.9의 관동대지진이었다. 9만9300명이 사망하고, 4만3500명이 행방불명됐으며, 가옥은 25만 채가 파괴되고 44만7100채가 불에 탔다. 인구밀집지역인 도쿄가 특히 피해가 심해 10만7500여명이 사망하거나 실종됐고 도쿄의 4분의3이 잿더미가 됐다.
방송과 신문마저 중단되자 근거없는 소문들이 사실인양 떠돌아다녔고 사람들은 그 소문에 이리저리 휩쓸렸다. “후지산이 폭발했다” “오가사와라 제도가 바다속에 잠겼다”는 등 소문이 꼬리에 꼬리를 물며 사람들의 불안감을 자극했다. 공포와 혼란에 휩싸인 그들을 더욱 흥분시켰던 것은 “조선인이 우물에 독을 탔다” “조선인들이 시내 곳곳에 불을 질렀다”는 괴소문이었다. 이때문에 각지에 일본도와 죽창으로 무장한 자경단이 각지에 조직돼 통행인을 검문했다.
그들은 조선인을 식별하기 위해 ‘15엔(円) 15전(錢)’과 ‘빠삐뿌뻬뽀(ぱぴぷぺぽ)’를 발음하게 하거나 ‘교육칙어’를 암송하도록 해 조선인으로 보이면 칼과 창을 마구 휘둘렀다. 내무성에서 지방에 내려보낸 ‘불령조선인(不逞朝鮮人) 단속’ 공문으로 군대와 경찰까지 동원돼 학살을 부추겼다. 일주일 동안 도쿄 일대에 거주하는 3만 명 가운데 6400명(일본 공식발표)의 조선인들이 이렇게 처참하게 죽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