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최초의 작곡가’ ‘한국최초의 바이올리니스트’…. 난파 홍영후에게는 ‘최초’라는 수식어가 유난히 많이 붙는다. 홍난파는 천상 음악인이었지만 한때는 문필가의 길을 걸었을 만큼 문재도 뛰어났다. 음악과 문학을 아우른 우리나라 최초의 음악잡지 ‘음악계’를 창간한 것도 홍난파였다. 그가 음악에만 전념하게 된 것은 “개천지 통만고(開天地 通萬古)에서 두가지 예술로 대성한 천재가 누구냐?”는 변영로의 충고가 있은 뒤였다.
어려서부터 음악에 재능을 보였던 홍난파는 전문음악기관인 조선정악전습소 양악부와 일본 우에노음악학교를 거치면서 개화기 우리 음악계의 선구자이자 스타로 우뚝 올라섰다. 홍난파의 이름이 지금까지도 우리의 기억 속에 또렷하게 살아있는 것은 ‘봉선화’ 때문이다. ‘봉선화’는 1920년 홍난파가 바이올린곡으로 작곡한 ‘애수’에 5년 뒤 김형준이 가사를 붙여 만든 곡으로, 한민족의 한과 설움을 고스란히 담아내 삽시간에 전국적으로 퍼져나가 암울했던 식민지시대에 한민족의 대표곡이 됐다.
‘고향생각’ ‘옛동산에 올라’ ‘성불사의 밤’ 등 지금까지 한국을 대표하는 많은 가곡을 작곡했지만 그의 관심 분야는 작곡에만 머물러 있지 않았다. 홍난파는 필요에 따라 작곡·연주·지휘를 넘나든 ‘3박자 음악인’이었고, ‘나소운’이라는 예명으로 21곡이 되는 대중가요까지 작곡한 팔망미인이었다. 그러던 그가 1941년 8월 30일, “내가 죽거든 연미복을 입혀 화장에 달라”는 유언을 남기고 43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