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0년대 초반까지 100만∼300만 명을 처형해가며 사상개조를 끝낸 마오쩌둥은 곧 경제재건에 나섰다. 담당 조직으로 ‘인민공사’를 설립하고 빠른 성과를 위해 ‘대약진운동’을 전개했다. 1958년 8월 29일, 허베이성 베이다이허에서 열린 중국 공산당 중앙정치국 확대회의에서 인민공사 설립이 결정됨으로써 중국 현대사에 또 하나의 비극이 더해졌다.
인민공사는 농업을 기본으로 공장·상점·병원 등을 경영하고 교육기관과 자체 민병대까지 갖춘 종합조직이었다. 수 십 가구로 이뤄진 생산대가 생산대대·인민공사로 확대되는 피라미드식 3단계로 구성됐다. 토지·농기구·가축은 인민공사 소유이고 생산은 집단으로 진행됐다. 이미 사상개조까지 마친 터라 농민들의 초반 호응은 열광적이었다. 3개월 후 전국에 2만6000여 개의 인민공사가 생겨나고 전 농가의 99%가 인민공사로 조직될 만큼 전국의 인민공사화는 빠르게 진행됐다.
그러나 충분한 검토없이 성급하게 시작한 게 문제였다. “15년안에 영국의 철강 생산량을 따라잡겠다”던 목표는 강철 대신 고철을 양산했고, 부풀린 농업 생산실적은 과중한 세금만 초래했다. 지나친 균등도 생산의욕을 감퇴시켰다. 결국 기아자가 속출했고 경제는 파탄으로 내몰렸다. 1959년부터 1962년까지 2000만 명이나 굶어죽었다. 마오쩌둥은 문제의 심각성을 뒤늦게 깨달았지만 사죄는커녕 변명만 늘어놓았다. “레닌도 마르크스도 과오는 있었다. 따라서 우리도…”라는게 마오쩌둥의 변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