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세의 대한 남아가 이룩한 쾌거는 보름 뒤 일장기 말소사건으로 이어져 동아일보에 시련을 가져다주었다. 동아일보 체육부 기자 이길용이 손기정의 시상식 장면 사진을 구한 것은 시상식이 끝나고 보름이나 지난 1936년 8월 24일이었다. 이길용은 일본 아사히신문의 화보잡지 ‘아사히 스포츠’에 실린 시상식 사진을 오려내 훗날 동양화가로 이름을 떨친 조사부 소속 이상범 화백에 사진을 건네며 “히노마루 부분을 엷게 처리해달라”고 요청했다. 신문 초판에서는 선명한 일장기가 그대로 인쇄됐으나 재판에서는 교묘히 삭제되어 있었다. 이상범과 사진과장 신낙균이 청산가리로 아예 일장기를 완전히 지워버린 것이다.
사진이 동아일보 8월 25일자 2면에 실리고 일본군사령부가 발칵 뒤집히면서 동아일보에는 일대 회오리가 몰아쳤다. 일제가 신문 발송을 금지시켰으나 이미 대부분이 발송된 후였다. 이 사건으로 동아일보는 이길용과 이상범은 물론 사회부장 현진건, 잡지부장 최승만 등 8명이 구속되고, 사장 송진우, 주필 김준연, 설의식 편집국장 등 13명이 회사를 떠나야하는 필화사건을 겪어야했다.
동아일보는 8월 29일자로 창간 이래 네 번째 무기정간 처분을 받았고 그 기간은 279일간이나 계속됐다. 여성동아의 전신인 ‘신가정’은 일장기를 싣지 않으려고 손기정의 다리 사진만을 신문에 싣고 “이것이 베를린마라톤 우승자, 위대한 우리 아들 손기정의 다리”라는 설명을 달았다가 동아일보와 함께 폐간되는 고초를 겪었다. 불똥은 뒤늦게 조선중앙일보에도 튀었다. 조선중앙일보는 동아일보보다 12일 앞선 8월 13일 일장기를 지운 사진을 신문에 실었으나 다행히도 그때는 무사히 지나갔었다. 그러나 동아일보가 일장기를 말소한 사진을 내보내는 바람에 총독부는 조선중앙일보에도 무기한 정간처분을 내렸다. 결국 이 일로 조선중앙일보는 문을 닫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