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도향의 본명은 나경손이다. ‘경사스런 손자’라는 뜻의 이름이 싫어 박종화에게 부탁해 호와 필명을 각각 도향과 빈으로 지었지만 가족들은 ‘벼의 향기’라는 뜻의 ‘도향’ 이름을 달가워하지 않았다. 향기란 잠시 있다가 곧 사라지는 것이라는 게 가족들의 생각이었다. 그때문은 아니겠지만 도향은 우리나라 작가 중 가장 젊은 나이인 24세에 요절했다.
1922년 1월, ‘백조(白鳥)’ 동인에 참여해 본격적으로 문학을 시작할 때까지 도향의 삶은 반항과 방랑이었다. 경성의전과 도쿄제대 의학부를 나오고도 경제적으로 무능했던 아버지와 할아버지의 갈등, 그리고 그의 문학적 열정에 대한 할아버지의 몰이해가 그를 밖으로 돌게 한 것이다. 열일곱에 돈을 훔쳐 일본으로 도망쳤다가 결국 고생만 하고 돌아온 뒤부터 도향은 더욱 가난에 시달렸고 고독과 번민에 빠져들었다. 이 때문에 초기 작품들은 눈물과 비애로 가득찬 감상적 낭만주의 경향을 띠었다.
그는 이때 낭만주의 조류를 내세운 백조파의 기수로 청년기의 감상에 젖은 소설을 발표해 일약 천재작가로 부상했다. 이와달리 1925년에 발표한 일련의 작품들, ‘벙어리 삼룡이’ ‘물레방아’ ‘뽕’ 등에서는 리얼리즘의 경향을 보이며 새로운 문학적 가능성을 선보였으나, 1925년 말 돈 한 푼 없이 다시 일본 유학길에 오른 것이 잘못이었다. 도쿄에서 걸린 폐결핵으로 귀국 몇개월 만인 1926년 8월 26일에 숨을 거둔 것이다. 그가 죽자 한때 그와 사랑을 나누었던 기생 단심이 머리채를 잘라 대문 안에 던져놓고 자취를 감추었다는 일화가 전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