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 개전 초기, 우리 군은 소련제 T34 탱크에 속수무책이었다. 급기야 육군본부는 오산·평택을 거쳐 대전으로 후퇴했고, 일본에서 급파된 미 제24사단도 대전에 포진했다. 그러나 인민군이 금강 전선에까지 다다르자 육군본부는 다시 대구로 이동하고 24사단도 대전철수를 결정한다. 충북 영동이 목적지였다.
사단장 윌리엄 딘 소장도 소수의 호위병과 함께 길을 떠났다. 그러나 남하도중 만난 옥천·금산 분기점은 그에게는 운명의 갈림길이었다. 옥천이 아닌 금산으로 길을 잘못 든 것이다. 곧 진로가 잘못됐음을 깨달았지만 되돌아갈 수도 없는 노릇이어서 밤을 기다려 산쪽으로 우회했다. 딘 소장은 적에게 쫓기는 와중에도 바주카포로 북한군 탱크를 2대나 박살내는 전과를 올렸다. 깊은 밤, 딘 소장이 친히 부상병들의 물을 뜨러갔다가 낭떠러지로 떨어져 의식을 잃은 사이, 그를 찾지 못한 호위장교는 본부에 실종 사실을 알렸다. 1950년 7월 20일이었다.
이때부터 딘 소장은 단신으로 방황하는 처지가 됐다. 1948년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될 때까지 10개월간 마지막 군정장관을 역임한 터라 한국 땅이 낯설진 않지만 사방엔 인민군 투성이였다. 부대를 찾아 산속을 헤맸고, 86㎏이던 체중도 58㎏으로 줄었다. 방황 36일째인 8월 25일, 전북 진안을 지날 때 길을 안내하겠다는 청년을 믿었던 게 잘못이었다. 그의 밀고로 공산당 자위대에 붙잡혔기 때문이다. 지옥같은 3년간의 포로생활이었지만 “육체는 포로라도 정신은 포로가 아니다”며 버텼다. 1953년 9월 4일, 교환포로 제1호로 자유의 품에 안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