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르망디 상륙작전의 성공으로 전세가 역전되면서 파리 해방도 시간문제였다. 1944년 8월 19일 공산당 계열의 프랑스 해방국내군(FFI)이 파리에서 무장봉기를 일으키자 파리주둔 독일사령관 폰 촐티츠가 드골파 레지스탕스 지도자에게 휴전을 제의한다. 양측은 휴전에 합의했으나 FFI가 이를 거부하는 바람에 전투가 재개됐다. 이 과정에서 FFI군 1000여 명이 전사하고 민간인도 580명이나 목숨을 잃었다.
8월 22일 베를린에서 파리 사령부에 한 통의 전문이 타전되었다. “파리를 파괴하라.” 히틀러의 지시였다. 전문을 수신한 통신 장교는 고민 끝에 12시간 늦게 이 사실을 사령관에게 보고했다. 그때 쯤이면 파리를 파괴할 시간적 여유가 없을 것으로 판단했기 때문이다. 전문을 보고받은 촐티츠도 부담스럽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는 전형적인 독일군이었지만 ‘인류문화의 보고’인 파리를 그의 손으로 파괴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결국 히틀러의 명령을 거부했다.
파리를 포위한 연합군 사령관 아이젠하워도 고민에 빠졌다. 자칫 진격 작전이 잘못되면 그 역시 파리를 파괴한 장본인으로 남을 판이었다. 아이젠하워는 파리 진격을 프랑스 제2기갑사단에게 맡겼다. 8월 24일 프랑스군은 파리에 입성했고, 이튿날 촐티츠는 항복문서에 서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