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8년 이란에서 석유가 발견된 이래, 원유의 생산·정제·판매를 독점한 것은 영국 자본인 ‘앵글로·이라니안 석유회사(AIOC)’였다. 2차대전 후 제3세계에서 민족주의가 고양되는 가운데 이란에서도 석유산업을 되찾아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아졌다. 이런 국민적인 감정을 타고 석유산업을 국유화하는데 앞장선 이가 무사데크다.
그는 영국은 물론 소련과도 일정한 거리를 둔 리버럴한 성향의 노(老) 정치가였다. 1951년 3월, 석유산업 국유화 법안이 상·하 양원에서 만장일치로 가결되자 무사데크는 일약 국민적인 영웅으로 떠올랐고 곧 총리에까지 올랐다. 당시의 이란 왕은 팔레비였다. 이 상황을 그냥 지나칠리 없었던 영국은 미국에 국유화를 저지하자고 제안하지만 트루먼 미국 대통령은 적극적인 협력을 주저한다. 그러나 후임자 아이젠하워는 자칫하면 이란이 소련의 수중에 떨어질 것을 우려해 적극개입에 나섰다.
미국·영국의 이란석유 불매운동과 경제봉쇄조치로 이란 경제가 심각한 타격을 입자 어느새 이란 국민들 사이에서도 반 무사데크 목소리가 높아졌다. 팔레비는 기회를 틈타 무사데크를 파면했으나 오히려 무사데크를 지지하는 세력들의 힘에 밀려 로마로 쫓겨난다. 그러나 1953년 8월 19일, 미국의 CIA 지원을 받은 친 팔레비 자헤디 장군이 쿠데타에 성공함으로써 사태가 역전된다. 결국 1주일 간의 시가전 끝에 무사데크는 체포됐고 이란의 탈 제국주의 몸부림은 2년 만에 끝이 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