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이 베트남 전쟁의 수렁 속으로 한창 빠져들고 있던 1969년 8월 15일, 사랑과 평화를 호소하는 젊은이들이 뉴욕 북서쪽의 작은 마을 베델의 한 농장에 몰려들었다. 훗날 ‘우드스탁 축제’로 불린 ‘평화와 음악의 사흘’이라는 록 축제가 15일부터 3일간 열리고 있는 곳이었다.
참가자는 당초 주최 측이 예상한 5만 명을 훨씬 뛰어넘어 40만 명을 헤아렸다. 대회장 주변 32㎞는 이들이 타고온 자동차·자전거 등으로 가득 메워졌다. 조운 바에즈, 재니스 조플린, 지미 헨드릭스 등 당대 최고의 포크·록의 영웅들이 참가해 흥을 돋우는 가운데 학생운동가·히피 등 축제 참가자들은 반나(半裸) 상태로 강렬한 비트에 몸을 맡긴 채 사흘 밤낮동안 평화를 노래하고 반전을 부르짖었다. 히피이즘적 저항문화가 록과 결합한 절정의 자리였다. LSD와 마리화나가 공공연하게 매매됐고, 출산 여성과 심장마비로 죽는 사람도 생겨났다. 2번의 폭우, 어설픈 설비, 빈약한 식·음료 어느것 하나 만족스럽진 않았지만 젊은이들은 훗날 ‘평화운동의 전설’로 불릴 축제의 추억을 가슴에 안고 돌아갔다. 그리고 축제의 성공을 그들의 승리로 해석했다. 조운 바에즈가 ‘60년대 진흙탕의 반영’이라고 평한 것처럼 축제는 반항적이고 낙관적이며 방종한 60년대를 상징했다.
젊은이들은 ‘우드스탁 축제’를 자신 세대의 연대(連帶)의 상징으로 받아들였고, 스스로를 ‘우드스탁 세대’라고 불렀다. 법정에 선 한 젊은이는 자신은 미국인이 아니고 ‘우드스탁 네이션의 일원’ 즉 ‘소외된 젊은이 나라의 국민’이라고 진술할 정도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