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 오늘

일본 쌀값 폭등으로 전국서 폭동

1918년, 일본의 쌀값이 폭등하기 시작한다. 전년도의 큰 흉작으로 쌀값이 꿈틀거리자 지주들이 쌀 방출을 꺼리고 상인들이 쌀을 매점한 게 원인이었다. 1년 전 일어난 러시아혁명을 저지하기 위해 일본이 군대를 시베리아에 파병한다는 소문까지 가세하면서 쌀값은 천정부지로 뛰어올랐다. 오사카 쌀 시세로 1되에 15엔이던 연초의 쌀값은 8월 1일 36엔10전, 5일 40엔50전, 9월에는 50엔으로 뛰어올랐다.

쌀값 등귀가 일으킨 연쇄반응으로 다른 생활필수품 가격까지 급등하자 주부들이 더 이상 참지 못하고 길거리로 뛰쳐나왔다. 8월 3일 도야마(富山)현의 주부 200여 명이 쌀가게로 쳐들어갔을 때만 해도 ‘주부 일규(一揆)’라고 표현했던 신문 제목처럼 작은 소동에 불과했다. 그러나 8일 쌀가게와 관청으로 몰려가 쌀값 인하를 요구하는 주부와 군중이 경찰의 무력 진압에 부상을 당하면서 소동은 대규모 폭동으로 발전했다. 신문에 상세하게 보도되면서 폭동은 전국 각지로 퍼져나갔다. 8월 10일에는 나고야, 교토, 오사카 등 대도시에서, 13일에는 도쿄에서도 발생했다. 군중들의 저지로 전차 운행이 중단되고, 일부 쌀가게와 정미소가 불에 탔다.

도시에서의 폭동은 곧 누그러지는 듯했으나 지방의 중소도시와 농촌으로 번져 2개월 동안 전국 500여 곳에서 70만 명 이상의 군중이 시위에 참가하고, 10만 명이 폭동 진압에 동원됐다. 역사상 전무했던 대규모 민중폭동에서 혁명의 위험을 감지한 일본의 정계 원로들은 군중의 불만 해소를 위해 9월 21일 데라우치 내각을 총사퇴시키고 국민의 지지를 받는 정우회 총재 하라 다카시(原敬)를 총리로 내세웠다. 국민은 일본 최초의 정당내각과 첫 평민 재상의 등장에 환호했다.

그러나 하라의 등장은 아시아 각국에는 큰 고통이었다. 쌀값 안정을 위해 아시아의 쌀 생산지대로 손을 뻗침으로써 아시아 각국의 쌀이 부족해지고 쌀값이 폭등했기 때문이다. 베트남으로부터는 쌀 수출의 40%를 사들여 이곳에서 쌀을 수입해온 다른 나라의 불만을 샀고, 홍콩과 중국에서는 폭등하는 쌀값에 군중이 쌀가게와 쌀창고를 약탈하는 일까지 벌어졌다. 일본이 1919년 한 해 동안 외국에서 사들인 1900만 가마의 쌀은 일본인 950만 명이 1년간 먹을 수 있는 엄청난 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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