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7년 8월 9일 새벽1시25분, 춘사 나운규가 짧은 생을 마감하고 전설 속으로 사라졌다. 일생이 영화였고 영화가 일생이었던 35년이었다. 17세에 고향을 떠나 중국 간도와 시베리아 일원을 떠돌던 나운규가 서울에 정착한 것은 그의 나이 18세 때인 1920년 봄이었다. 그러나 북간도에서 광복군 일을 도왔던 것이 뒤늦게 밝혀져 1년6개월의 형을 선고받고 청진·함흥 형무소에서 복역했다.
출소 후 나운규의 삶은 모두 영화에 바쳐졌다. 1924년 영화 ‘해(海)의 비곡(悲曲)’에 단역으로 출연한 것이 그의 영화 인생의 첫 출발이었다. ‘심청전’에서는 심봉사역을 맡아 배우로서의 가능성을 인정받았다. 재능을 인정한 조선키네마프로덕션이 그에게 연출 기회를 주어 제작된 영화가 한국 영화사의 기념비적인 작품이 된 ‘아리랑’이다. 감독·각본에 출연까지 한 사실상의 원맨쇼였다.
1926년 10월 1일 단성사에서 영화가 개봉되자 ‘조선 영화계의 자랑거리’라는 찬사와 함께 나운규는 명성과 인기를 한꺼번에 거머쥐었다. 24세 때였다. ‘아리랑’ 성공에 이어 그해 12월 개봉한 ‘풍운아’까지 흥행에 성공하자 1927년 9월 당대의 거물급 흥행사 박승필과 손을 잡고 ‘나운규 프로덕션’을 설립, 본격적으로 영화제작에 나섰다. ‘잘 있거라’ ‘옥녀’ ‘벙어리 삼룡’ 등 5편을 만들어 흥행을 성공시켰으나 기생 출신의 애인 유신방을 만나 방탕하고 무절제한 생활을 하면서 점차 파탄의 길을 걸었다. 1936년 결국 마지막 작품이 된 ‘오몽녀’를 감독해 극찬을 받았으나 그때 나운규는 폐결핵 악화로 피를 토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