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토리박스

[연인과 부부 (26)] 가수 이난영의 두 남자 김해송과 남인수… ‘천재 뮤지션’ 남편(김해송)과는 생이별하고 ‘가요계의 거성’ 동거남(남인수)과는 사별했던 이난영의 희로애락

↑ 왼쪽부터 김해송, 이난영, 남인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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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지지

 

이난영(1916~1965)은 해방 이전엔 당대 최고 여가수로 각광을 받았던 ‘가요계의 여왕’이었다. 트로트, 신민요, 만요, 재즈 등 장르를 자유자재로 넘나들고 일본·중국에까지 활동무대를 넓혔던 1930~40년대 전방위 가수였다. 자신의 딸들로 구성한 ‘김시스터즈’를 미국에 진출시켜 한류 열풍을 불러일으킨 한류 원조이기도 했다. 이난영이 함께 살았던 두 남자 중 김해송(1911~1950?)은 1930~40년대 우리 대중음악계의 ‘천재 뮤지션’으로 통했던 인물이다. 그는 노래도 부르고 악기도 다뤘지만 특히 작곡과 쇼단 운영에 탁월했다. 이난영의 또 다른 남자 남인수(1918~1962)는 당대를 풍미한 ‘서정가요의 황제’이자 ‘가요계의 거성’이었다. 이난영의 노래 활동과 그 과정에서 만난 두 남자와의 사랑과 작별을 알아본다.

 

■이난영의 가수 입문

이난영은 목포 앞바다가 내려다 보이는 유달산 자락에서 태어났다. 호적부와 학적부에는 이옥순으로 기록되어 있으나 집에서는 이옥례로 불렸다. 위로는 훗날 작곡가가 될 2살 많은 오빠 이봉룡이 있었다. 1923년 목포공립여자보통학교(현 북교초등학교)에 입학했으나 가난 때문에 휴학과 복학을 반복하다가 4학년 때인 1929년 학교를 자퇴하고 어머니가 있는 제주도로 건너갔다. 어머니는 남편의 술주정과 가난이 싫어 2년 전 아들 이봉룡을 데리고 집을 뛰쳐나가 제주도에서 극장을 운영하는 일본인 집에서 식모살이를 하고 있었다.

옥례는 그곳에서 허드렛일을 하면서 노래를 흥얼거렸다. 일본인 주인은 옥례의 노래 솜씨가 보통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자신의 극장에서 공연하는 순회 악극단에 옥례를 소개해 ‘막간 가수’가 되게 했다. 옥례는 노래 실력을 인정받아 16살이던 1932년 태양극단에 입단했다가 1933년 태평레코드사에 발탁되어 그해 9월 ‘시드는 청춘’과 ‘지나간 옛 꿈“을 녹음함으로써 레코드 가수로 데뷔했다. 그런데 당시 흥행계의 거물인 오케레코드 사장 이철이 이난영이 태평레코드와 전속계약을 맺지 않은 것을 알고 이난영에게 접근해 먼저 전속계약을 체결했다. 당시 오케레코드 직원이 이난영을 데려오는 과정에서 태평레코드사 직원들과 자동차 추격전을 벌이는 등 암투를 벌였다는 내용이 ’별건곤‘ 잡지 1933년 11월호에 상세하게 기사화되었다.

이철 사장은 옥례라는 이름이 가수명으로서는 적절하지 못하다며 난영(蘭影)이란 예명을 새로 지어주었다. 옥례가 이난영 이름으로 처음 녹음한 노래는 1933년 10월 오케레코드에서 취입한 ‘향수’였고 첫 히트곡은 1933년 11월 발표한 ‘불사조’였다. 1934년 2월에 발표한 ‘봄맞이’까지 인기를 얻으면서 이난영은 단숨에 촉망 받는 신인가수로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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