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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인과 부부 ⑦] ‘대문호’ 이광수에게 의사이자 기자였던 허영숙은 아내·누이·어머니였다

↑ 이광수와 허영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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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지지

 

허영숙은 국내 여성 최초로 병원을 개원한 의사이자 일제하 여기자

국내 여성 최초로 병원을 개원한 의사로, 병든 남편을 지키는 아내로, 네 아이의 어머니로, 일제하 여기자로 다중의 삶을 산 신여성이 있다. 분야마다 그보다 뛰어난 여성이 더러 있긴 했지만 이 넷이 중첩되는 영역에서는 독보적이었다. 그의 이름은 허영숙(1897~1975)이다. ‘대문호’ 이광수의 아내라서 세간의 주목을 더 받은 것은 사실이지만 이광수의 그늘에 묻혀 있기에는 그가 남긴 궤적이 굵고 선명했다.

1928년 무렵의 이광수와 허영숙. 아이는 첫아들 봉근이다.

 

허영숙은 서울에서 부유한 상인의 딸로 태어났다. 진명보통학교(1911)와 경성여자고등보통학교(1914, 경기여고의 전신)를 졸업한 후 1914년 4월 일본의 도쿄여자의과전문학교(도쿄여의전)에 입학했다. 의학을 전공하기 위해 해외로 유학한 여성으로는 김점동에 이어 두 번째였고 일본 유학은 최초였다.

참고로 우리나라 최초 여의사는 김점동이다. 서양의 선교사들은 그를 남편 박씨 성을 따라 박에스더라 불렀다. 그는 자신이 통역해주던 미국인 여의사 로제타 홀의 의술을 지켜보면서 여의사를 꿈꾸다가 1895년 로제타가 미국으로 귀국할 때 남편 박유산과 함께 따라가 미국에서 공부했다. 1900년 볼티모어 여자의학교를 졸업하고 귀국해 선교병원에서 환자를 돌보았으나 폐결핵에 걸려 1910년 33세의 짧은 나이에 삶을 마감했다.

허영숙이 유학을 떠난 1914년 국내에서는 조선총독부 의원양성소(1916년 경성의학전문학교로 승격)에서도 청강생 제도를 신설해 안수경·김해지·김영홍 3명의 여학생을 입학시켰다. 이들 3명은 1918년 3월 경성의학전문학교 졸업과 동시에 의사 면허를 취득했다.

이영숙이 이광수를 처음 알게 된 것은 이광수가 일본에 있을 때 국내 매일신보에 연재한 장편소설 ‘무정’(1917년 1월 1일~6월 14일)이 전국적으로 인기를 끌어 유명인사로 떠오른 1917년 3월이었다. 당시 허영숙은 도쿄여자의과전문학교에 재학 중이었다. 이광수가 일본에서 폐병으로 각혈까지 하던 중 허영숙의 헌신적인 간호를 받고 위기를 넘기면서 둘의 사랑이 시작되었다.

이광수

 

두 사람은 도쿄에서 수백 통의 편지를 주고받으며 사랑을 키워갔으나 허영숙이 1918년 7월 도쿄여자의학전문학교를 졸업하고 귀국하면서 이별의 아쉬움을 달래야 했다. 하지만 이광수도 곧 귀국, 8년 전 결혼한 첫 부인과 1918년 9월 이혼하고 다음 달 허영숙에게 청혼했다. 그러나 허영숙의 부모는 이혼 경력에 4살 된 아들까지 있는 이광수와의 결혼을 적극 반대했다. 그러자 두 사람은 1918년 10월 허영숙이 조선총독부가 시행한 의사 검정시험에 합격한 뒤 북경으로 사랑의 도피를 감행, 조선 사회를 떠들썩하게 했다.

 

허영숙과 결혼하자 이광수에게 온갖 억측과 비난 쏟아져

당시 국내에는 경성의학전문학교를 졸업한 3명의 여성이 이미 의사로 활동하고 있었다. 허영숙은 중국에서 돌아와 1년간 임상 수련을 거친 뒤 자기 집을 개조해 산부인과와 소아과를 전문으로 하는, 여성이 개원한 조선 최초의 병원을 1920년 5월 개원했다. 병원 이름은 허영숙에서 ‘영’을, 광혜원에서 ‘혜’를 따 ‘영혜의원’이라 지었다.

서울 효자동에서 병원을 개업할 당시의 허영숙(앞줄 가운데)

 

허영숙은 이광수가 상해에서 독립운동 관련 일에 매진하고 있던 1921년 2월 상해로 건너가 이광수에게 함께 귀국할 것을 종용했다. 그러자 상해의 독립운동가들 사이에 큰 파문이 일어났다. 임시정부가 “허영숙은 일제 앞잡이”라며 체포령을 내리고 안창호도 이광수의 귀국을 만류했으나 이광수는 1921년 2월 먼저 허영숙을 돌려 보내고 3월 말 홀로 귀국하다가 중국 심양에서 체포되어 서울로 압송되었다. 그런데도 재판도 받지 않고 불기소 석방되어 독립운동가들의 의심을 샀다.

이광수와 허영숙이 1921년 5월 결혼하자 이광수에 대한 억측과 비난이 빗발쳤다. 그래도 이광수는 묵묵히 집안에 들어앉아 병을 치료하며 저 유명한 ‘민족개조론’을 집필했다. 1922년 2월에는 흥사단의 국내 지부격인 수양동맹회(1926년 1월 수양동우회로 개칭)를 결성, 궁극적으로 민족의 힘을 기르는 것을 목표로 한 부르주아 민족운동을 펼쳤다.

허영숙은 더 수준 높은 의학 공부를 하겠다며 1922년 3월 다시 도쿄로 떠났다가 도쿄제국대 입학이 여의치 않자 4개월 만에 서울로 돌아왔다. 귀국 후에는 폐결핵으로 동아일보 기자 일을 할 수 없게 된 이광수를 대신해 1924년 말 동아일보의 부인 기자로 입사했다. 전공을 살려 가정 위생과 건강관리에 관한 글을 써 1925년 12월에는 학예부장으로 승진했다. 그러다가 첫아들 봉근을 임신하자 1927년 3월 신문사를 그만두었다. 이광수에게는 전 부인이 낳은 아들이 있었지만 허영숙에게는 첫아들이었다. 2년 후 영근, 다시 4년 후 정란, 다시 2년 후 정화가 태어났다.

1943년 무렵의 이광수 가족. 왼쪽부터 허영숙, 정화(차녀), 정란(장녀), 영근(아들), 이광수. 장남인 봉근은 7살 때 병으로 숨져 사진 속에 없다.

 

그러던 중 1934년 2월 장남 봉근이 패혈증으로 숨져 인생의 허무를 느끼게 되었다. 삶의 의욕을 상실한 허영숙은 1935년 11월 병든 남편과 자식 셋을 서울에 남겨두고 선진 의학을 배우기 위해 홀로 도쿄로 건너갔다. 의학에서 손을 놓은 지 15년이나 지나고 새로 공부한다는 게 엄두가 나지 않을 38살 때였다.

 

이광수의 소설 ‘사랑’은 허영숙의 헌신적 사랑에 대한 헌정 소설

허영숙이 구상한 병원은 해산을 전문으로 하는 산원이었다. 처음에는 일본의 적십자병원 산원 연구생으로 들어갔다가 3년 예정의 조수로 채용되었다. 그러자 마음을 굳게 먹고 서울의 아이들을 도쿄로 불러들였다. 아이들을 곁에 두고 밤늦게까지 공부하며 박사 논문을 준비했으나 1937년 6월 이광수가 수양동우회 사건으로 감옥에 갇히게 되자 공부를 중단하고 1년 반 만에 귀국했다. 그리고 1938년 6월 서울 효자동에 국내 최초의 산원인 ‘허영숙 산원’을 개원했다.

어머니로, 기자로, 의사로 정신없는 날들을 보내면서도 이광수에 대한 그의 사랑은 헌신적이었다. 이광수에게 허영숙은 아내이자 누이였고 어머니였다. 1938년 이광수가 발표한 소설 ‘사랑’은 허영숙의 헌신적 사랑에 대해 이광수가 바치는 헌정 소설이었다. 하지만 소설 속 사랑과 현실 사이에는 엄청난 괴리가 있었다. 이광수는 문인이었고 허영숙은 의사였다. 따라서 한쪽이 감성적 인간이라면 한쪽은 이성적 인간이었다. 허영숙은 생활력이 ‘빵점’이고 무욕의 삶을 사는 남편을 향해 “세상 살아갈 줄 모른다”며 바가지를 긁어댔다. 그러면서도 폐병에 걸린 이광수의 주치의이자 간병인이었고, 후견인이자 매니저였다.

1944년 이광수의 양주군 사릉리 자택

 

허영숙·이광수 부부는 1944년 3월 경기 양주군 사릉리로 이사해 살다가 해방을 그곳에서 맞았다. 해방 후 이광수가 반민특위에 회부될 때는 가정의 재산을 지키기 위해 1946년 6월 남편과 합의이혼하는 끈질긴 생활인의 모습을 보였다. 이광수의 납북으로 생이별을 한 뒤에는 세 자녀를 미국으로 유학 보내 각각 물리학 박사, 영문학자, 생화학자로 키워냈다. 자신은 홀로 서울에 남아 출판사를 운영하며 1963년 남편의 원고를 모두 모아 ‘춘원전집’을 완간한 뒤 1971년 2월 미국으로 건너가 세 자녀와 함께 살았다. 그러다가 1975년 5월 춘원 기념비 건립을 위해 귀국했으나 폐렴 악화로 1975년 9월 7일 서울에서 세상을 떠났다.

이정화(막내)-아이젠가 부부와 두 자녀들. 가운데가 이광수의 부인 허영숙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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