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토리박스

“불 찾는 불나방처럼 살인을 저질렀다”는 살인마 이춘재의 자백… 그가 저지른 화성 연쇄살인 사건(10건) 등 총 15건의 살인 사건 심층해부

↑ 영화 ‘살인의 추억’의 한 장면

 

by 김지지

   

이춘재는 능지처참해야 할 인간 말종, 그러나 그가 살아있어 윤여성의 억울함이 풀린 것은 역설

 

‘화성 연쇄살인 사건’이 처음 일어난건 1986년이다. 이후 1991년까지 총 10건의 연쇄 살인사건이 일어났다. 그런데도 경찰이 범인을 잡지 못해 사건은 30여년간 미제 사건으로 분류되어 경찰의 캐비닛 속에 처박혀 있었다. 그러던 중 2019년 9월 우연한 기회에 감옥에 있던 이춘재(57)가 범인으로 밝혀졌다. 이춘재는 2020년 11월 2일 법정에서 10건의 화성 연쇄살인 사건 모두 자신이 범행했다고 자백했다. 살인 사건과 무관한 윤여성(53)씨에게 20년간 옥살이를 시켰던 화성 8차 사건도 자신의 범행이라고 실토하면서 화성 연쇄살인 사건의 전모가 사실상 드러났다. 이춘재의 살인 행각과 윤여성씨가 1989년부터 30여년 동안 어떤 고초를 겪었는지 사건 속으로 들어가본다.

   

■ 이춘재의 자백

 

1986년 첫 사건 이후 30여년 간 미제사건으로 남아있던 화성 연쇄살인 사건의 범인이 이춘재라는 사실은 어떻게 밝혀진 것일까. 경찰은 2019년 7월, 화성 9차 사건(1990년)의 유류품 일부를 국립과학수사연구원(국과수)에 감정 의뢰했다. 그런데 그해 8월 국과수가 부산교도소에 수감 중인 이춘재의 DNA가 유류품에서 검출되었다는 사실을 통보해왔다. 경찰은 30여년 간 온나라를 들쑤셔놓았던 화성 연쇄살인 사건의 범인이 감옥에 있다는 검사 결과가 믿겨지지 않았다. 경찰은 3·4·5·7차 사건 유류품도 감정의뢰했다.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경찰이 이춘재에게 DNA가 확인된 사실을 제시했으나 이춘재는 부인했다. 하지만 2019년 9월 24일 프로파일러와 면담 과정에서 어린시절부터 살아온 얘기를 나누면서 마음이 열려 화성 연쇄살인 사건의 범행 일체를 자백하기 시작했다. 또한 경찰이 따로 사건 관련 자료를 제시하지 않았으나 스스로 기억을 되살려 범행 장소 약도까지 그려가며 범행을 털어놓았다. 그러면서 ‘화성 8차’ 사건도 자신의 범행이라고 자백했다. 그때까지 화성 8차 사건은 경찰과 검찰의 강압수사로 애꿎은 윤여성이 범인으로 확정되어 20년간 옥살이를 했기 때문에 이춘재와는 무관한 사건이었다. 그런데 화성 8차 사건도 이춘재가 저질렀다는 자백에 경찰은 아연실색했다.

 

“범행을 저지르다 중간에 멈추면 강간이 되고 진행하면 살인이 된다”

이런 사실이 공개되자 8차 사건 범인으로 억울하게 옥살이를 한 윤성여씨가 재심을 신청했다. 법원은 2020년 1월 화성 8차 사건의 재심을 결정하고 재심 재판부는 이춘재가 정말 8차 사건의 범인인지를 확인하기 위해 이춘재를 증인으로 채택했다. 이에 따라 이춘재는 2020년 11월 2일 열린 수원지법의 ‘화성 연쇄살인 8차 사건’ 재심 법정에서 화성 연쇄살인 10건뿐 아니라 미제로 남아 있던 추가 살인 사건까지 포함해 모두 14건의 살인 사건 범인이 자신이라고 공개적으로 자백했다.

수원지법은 2020년 12월 17일 열린 윤성여씨의 재심 선고공판에서 무죄를 선고했다. 이에 따라 윤씨는 1988년 8차 사건이 발생한 지 32년, 대법원에서 무기징역이 확정된 지 30년만에 무죄가 되었다. 재판부는 “경찰에서의 가혹행위와 수사기관 부실수사가 발견됐고 잘못된 선고가 나왔다. 20년 동안 정신적 고통 겪었을 피고인에게 법원이 마지막 역할을 못한것은 사법부 구성원의 일원으로 사과 드린다. 피고인에게 위로가 되고. 보탬이 되기를 진심으로 기원한다”고 밝혔다.

이춘재가 벌인 살인은 처제 살인까지 포함하면 모두 15건이다. 그런데도 이춘재는 살인죄의 공소시효 15년이 만료되어 재판이나 처벌을 받지 않는다. 이춘재의 마지막 10차 범행도 2006년 4월 공소시효가 끝났다. 2007년 살인죄 공소시효가 25년으로 늘었지만 이를 적용해도 공소시효가 지났다. 경찰은 이춘재 범죄와 관련된 수사를 진행했던 검사와 경찰 등 9명도 함께 검찰에 송치했다. 당시 수사 경찰관이 윤여성을 화성 8차 사건의 범인으로 지목한 후 구속영장 발부 없이 3일간 부당하게 구금하고 폭행과 가혹행위, 허위자백과 허위 진술서 작성 등을 강요한 것으로 밝혀졌기 때문이다. 그러나 경찰과 검찰 역시 역시 공소시효가 끝나 처벌은 받지 않는다.  

이춘재. 왼쪽부터 중학생, 고등학생, 재소자일 때 모습

 

■ 8차 사건과 윤여성

 

경찰과 검찰이 윤여성을 범인으로 몰고가 억울하게 20년간 옥살이를 하게 한 ‘화성 8차 사건’은 어떤 사건일까. 당시 상황으로 들어가본다.

1986년 9월부터 1988년 9월까지 경기도 화성과 수원에서 7건의 여성 연쇄살인사건이 일어났다. 그런데도 경찰은 범인의 윤곽조차 밝혀내지 못했다. 사회와 언론으로부터 집중 포화가 쏟아졌다. 그러던 중 1988년 9월 16일 경기 화성군 태안읍 진안리 한 가정집에서 여중생이 성폭행을 당하고 목이 졸려 숨진 채 발견되는 화성 8차 사건이 일어났다. 경찰은 8차 사건을 기존의 연쇄 살인 사건과는 다른 성격의 모방범죄라고 봤다. 범행 현장이 야산과 논길 등 야외가 아닌 가정집이고 피해자 입에 재갈을 물리거나 옷가지로 매듭을 만들어 묶는 기존 7차례의 수법을 쓰지 않았기 때문이다.

경찰은 시신에서 용의자 것으로 추정되는 음모를 채취해 국과수에 감정을 의뢰했다. 사건 발생 10여일만에 국과수에서 넘어온 현장 음모의 혈액형 감정 결과에 따르면 용의자의 혈액형은 B형이었다. 경찰은 범인으로 의심되는 B형 사람들의 음모를 채취해 외관상 형태가 현장 음모와 비슷한지 확인하는 방식으로 수사를 시작했다. 하지만 음모의 구별이 쉽지 않고, 당시 국과수 혈액형 판정법의 정확성도 크게 떨어졌다.

경찰 수사는 이전의 7차례 사건처럼 다시 제자리걸음을 했다. 무리한 수사가 검찰에서 제동이 걸리기도 했다. 당시 언론 보도를 보면 유력 용의자로 자백했다던 10대와 20대들이 증거불충분, 자백의 신빙성 문제로 풀려나는 사례가 수두룩했다. 경찰은 1989년 들어 음모의 혈액과 형태가 유사한 것으로 판명된 용의자들의 음모를 다시 추려낸 뒤, 방사성 동위원소 감정을 실시해 동일성 여부를 확인하기로 했다.

 

경찰과 검찰이 윤여성을 무기수로 결론짓는 데는 채 석달도 걸리지 않아

경찰은 방사성 동위원소 감정에 앞서 현장 음모 성분 중 티타늄 함량이 높다는 감정 결과에 주목했다. 경찰은 범인이 금속을 다루는 직업에 종사한다고 보고 인근의 관련 업체에서 일하는 남성들을 대상으로 수사망을 좁혀나갔다. 경찰은 티타늄 성분을 자주 사용할 만한 공장 등을 돌며 윤여성 등 40여명의 음모를 다시 채취해 1989년 5월 혈액과 형태에 대한 감정을 국과수에 의뢰했다. 한달 뒤 경찰에 전달된 감정서에는 윤여성 등 2명의 음모가 B형이고 현장 음모와 모양이 유사하다는 내용이 담겨있었다.

경찰은 7월 윤여성의 음모를 또다시 채취해 별도로 국과수에 방사성 동위원소 감정을 맡겼다. 당시 방사성 동위원소 분석 장비는 한국원자력연구원에만 있었다. 국과수는 한국원자력연구원 분석 결과를 토대로 ‘현장 음모와 윤여성의 음모는 동일인 음모로 볼 수 있다’는 내용의 감정서를 작성해 경찰에 전달했다. 경찰은 이 감정서를 근거로 윤여성을 1989년 7월 25일 연행·조사해 자백을 받은 뒤 사건을 검찰에 송치했다. 이후 모든 게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검찰은 윤여성을 살인·강간치사 혐의로 구속·기소하고 법원은 윤여성에게 무기징역을 선고했다. 국과수 감정서 발급(7월 24일)부터 1심 무기징역 선고(10월 20일)까지 우리 형사사법시스템이 윤여성을 무기수로 결론짓는 데는 채 석달도 걸리지 않았다.

 

■ 윤여성은 어쩌다 범인으로 몰렸을까

 

윤여성은 세 살 때 소아마비를 앓아 왼쪽 다리가 매우 불편했다. 성인 남성 팔뚝보다도 가느다란 다리로 걸음을 옮길 때는 허리가 좌우로 휘청댔다. 이런 다리와 160㎝ 정도의 키로 170㎝ 높이의 담을 넘어 범행을 저지르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했다. 그런데도 경찰은 그를 범인으로 몰고갔다. 경찰을 지휘한 검사도 마찬가지였다. 한쪽 다리가 불편한 윤여성이 범행 현장에서 문 앞을 가로막고 있던 책상 위 책장을 넘어가기 쉽지 않은 점 등 윤여성의 범행을 배척할 만한 현장 정황들이 여럿 있었음에도 모두 무시했다.

윤여성은 훗날 당시를 이렇게 회상했다. 경찰서에 도착하니 경찰이 폭력을 휘두르면서 “죽을 수도 있다”고 협박했다. 범행을 부인하면 주먹이 날아왔다. 3일간 잠도 자지 못하게 했다. 검사는 이런 죄목이면 사형을 받을 수 있다고 겁을 주었다. 그러자 윤여성은 여기서 죽어나간들 아무도 신경 쓰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결국 고문과 협박, 그리고 사형만은 면해야겠다는 생각으로 보통 사람도 넘기 힘든 담을 불편한 다리로 넘어 범행을 저질렀다고 자백했다. 현장검증은 경찰이 써준 대로 했다. 경찰이 담 아래 쌓아놓은 벽돌을 밟고 담을 넘어가는 시늉만 했다. 경찰이 작성한 조서는 읽어보지도 못했고 시키는 대로 지장을 찍었다.

 

경찰 고문과 협박, 그리고 사형만은 면해야겠다는 생각으로 범행을 저질렀다고 자백

윤여성은 혐의를 인정해 1심에서 무기징역을 선고받았다. 법원이 실형을 선고한 가장 중요한 근거는 국과수가 직접 수행한 ‘중성자 방사화 분석’ 결과였다. 법정에 처음 제시된 새로운 과학수사 기법이었지만 법원은 낯선 첨단 수사기법에 대한 확인이나 검증 노력은 아무도 신경 쓰지 않았다. 과학 상식이 턱없이 부족했던 경찰·검찰·재판부가 국과수의 설익은 분석법을 무작정 믿어버렸다. 윤여성의 신체적 장애에 대한 고려도 없었고, 심한 고문을 받았다는 절박한 주장도 무시했다.

윤여성은 1심 때와는 달리 “경찰의 가혹 행위 등으로 거짓 자백을 했다”며 항소와 상고를 했으나 2·3심 재판부는 받아들이지 않았다. 결국 대법원에서 무기징역이 확정되었다가 20년으로 감형되어 2009년 가석방되었다. 그렇게 화성 8차 사건은 윤여성의 범행으로 확정된 뒤 세상에서 잊혀졌다.

그러던 중 2019년 9월 이춘재가 화성 8차 사건도 자신의 소행이라고 자백하면서 8차 사건이 다시 세상에 소환되었다. 여론이 들끓자 검찰이 재조사에 착수했다. 그리고 “한국원자력연구원의 감정 결과와 국과수의 감정서 내용은 비교 대상 시료와 수치 등이 전혀 다르다”며 “1989년 7월 윤여성이 범인으로 검거되기 전날 국과수가 경찰에 회신한 ‘현장 음모와 윤씨의 체모가 일치한다고 볼 수 있다’는 내용의 감정서가 실수가 아니라 허위로 조작된 것임을 확인했다”고 조사 결과를 발표했다. 국과수가 현장에서 발견된 체모와 여러 용의자의 체모 등을 한국원자력연구원에 중금속 성분 분석을 의뢰해 감정 결과를 받은 뒤, 윤여성의 체모 분석 결과와 비슷한 체모를 범인의 것으로 보이도록 조작했다고도 했다. 그러면서도 당시 검찰의 잘못은 두루뭉술 넘어갔다.

 

■ 화성 연쇄살인 1차에서 7차까지

 

1986년 9월 15일 오후 2시경, 경기도 화성군 태안읍 안녕리의 한 목초지에서 하의가 벗겨지고 두 다리는 무릎이 굽어진 채 목이 졸려 살해된 71세 할머니의 시신이 발견되었다. 할머니는 딸 집에서 잠을 자고 새벽에 귀가 중이었다. 사인은 액살(손으로 목을 졸라 살해)에 의한 경부압박 질식사였다. 경찰은 인근 불량배나 우범자에 의한 단순 살인사건 정도로만 생각했을 뿐, 그것이 4년 7개월 동안 이춘재가 온 나라를 공포와 두려움으로 몰고 갈 화성 연쇄살인 사건의 시작이라고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그로부터 한 달 뒤인 1986년 10월 20일 밤10시, 이번에는 1차 사건 현장에서 500m밖에 떨어지지 않은 태안읍 진안리 농수로에서 수양부모 집에 갔다가 귀가하던 20대 미혼여성이 성폭행을 당한 뒤 옷이 벗겨진 상태에서 살해된 화성 2차 사건이 발생했다. 이번에도 사인은 액살에 의한 경부압박 질식사였다. 시신은 3일 뒤 발견되었다.

다시 2개월 뒤인 1986년 12월 12일 늦은밤, 이번에는 경기 수원에서 남편과 헤어져 귀가하던 20대 신혼주부가 실종되는 ‘3차 사건’이 일어났다. 시신은 4개월 뒤, 1·2차 사건이 일어난 곳에서 수백m 떨어진 태안읍 안녕리 축대 위에서 발견되었다. 머리에 팬티가 씌워지고 입에는 거들과 스타킹으로 재갈이 물린 모습이었다. 이번 사인은 액살이 아니라 스타킹으로 목을 죈 교살이었다.

3차 사건 후 수사본부가 대폭 확대되고 마을 방범에 투입된 경찰력이 대거 늘어나 범행 발생 지역 일대에는 “주민보다 경찰이 많다”는 얘기가 나돌 정도였다. 그런데도 얼굴 없는 살인마의 엽기적인 살인 행각은 계속되었다. 3차 사건 피해자가 실종된 지 이틀 만인 1986년 12월 14일 늦은밤에도 수원에서 선을 본 뒤 버스를 타고 내려 집으로 돌아가던 20대 초반의 미혼여성이 실종되는 4차 사건이 일어났다. 시신은 실종 7일 만에 집 근처인 정남면 관항리 논둑에서 발견되었다.

화성 6차 사건을 보도한 조선일보 1987년 5월 12일자 지면

 

실물과 비슷한 몽타주 그려 전국에 수배했으나 실패

해가 바뀌어도 연쇄살인 행각은 계속되었다. 1987년 1월 10일 밤 수원에서 친구를 만나고 돌아오다 살해된 여고생이 태안읍 황계리 논바닥 짚단더미에서 숨진 채 발견되는 5차 사건이 일어났다. 이처럼 불과 4개월 사이에 반경 10㎞ 내에서만 부녀자 5명이 잇따라 살해되자 화성은 공포 지역이 되었고 주민들은 두려움에 떨었다. 6차 사건은 4개월 뒤 발생했다. 1987년 5월 2일 밤 11시쯤 남편을 마중나갔다가 실종된 주부(28세)가 7일 뒤 태안읍 진안리 야산에서 브래지어와 블라우스로 목이 졸려 숨진 채 발견되었다.

한동안 잠잠하던 연쇄살인 사건(7차)이 일어난 것은 1년 4개월이 지난 뒤였다. 1988년 9월 7일 밤 수원에서 아들의 식당 일을 돕고 귀가하던 주부(52세)가 실종되었다가 다음날 수원시 팔탄면 가재3리 농수로에서 입에 재갈이 물리고 입고 있던 상의로 목이 졸려 숨진 채 발견되었다. 7차 사건 때는 용의자로 보이는 남자를 태웠다는 버스기사와 안내양의 진술이 확보되어 경찰의 검거 의욕을 불러 일으켰다. 경찰은 20만 장의 수배 전단을 배포하고 경기도 수원시 15개동과 화성군 6개면 남자 주민 5만 명에 대한 주민등록 사진을 운전기사와 안내원에게 확인토록 했다. 그러나 이번에도 범인은 검거하지 못했다. 경찰은 안내양과 버스 기사의 증언 등을 근거로 ‘신장 165~170㎝, 오똑한 코에 날카로운 눈매의 24~27세 남자’의 몽타주를 그려 전국에 수배했으나 역시 실패로 끝났다.

당시 배포했던 이춘재의 몽타주

 

사실 6차 사건(1987.5)과 7차 사건(1988.9) 사이 1년 4개월동안 이춘재의 범행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2019년 이춘재의 자백으로 알려진 수원 여고생 살인사건(1987.12.24)이다. 이 글에서는 편의상 ‘추가 사건 1차’로 구분한다. 경찰은 이 사건을 연쇄살인 사건으로 분류하지 않아 주요 관심에서는 벗어나 있었다.

 

■ 화성 연쇄살인 9차와 10차

 

연쇄살인 사건은 7차 사건(1988.9) 이후 한동안 잠잠했다. 이춘재가 7차 사건을 벌이고 9일 뒤인 9월 16일 다시 8차 범행을 저질러 경찰의 수사망이 촘촘해져 스스로 조심했기 때문이다. 그러다가 8차 사건 10개월 후인 1989년 7월 7일 학교 수업을 마치고 귀가하는 초등학생(7세)이 태안읍 병점5리 야산에서 살해되는 사건(추가 사건 2차)이 일어났다. 시신은 끝내 발견되지 않았다. 이 사건 역시 화성 연쇄살인 사건으로 분류되지 않았으나 이춘재는 2019년 이 사건도 자신이 저질렀다고 자백했다.

이후 1년 4개월 동안 범행이 일어나지 않았다. 이춘재가 1989년 9월 26일 새벽 수원시 권선구에 있는 가정집에 과도와 면장갑을 들고 들어갔다가 주인에게 발각되어 강도 예비, 폭력 등의 혐의로 구속 기소되었기 때문이다. 이춘재는 이듬해인 1990년 2월 7일 1심에서 징역 1년 6개월을 선고받자 항소했다. 2심 재판부는 “초범에 피해자가 입은 피해가 경미하고, 피고인의 가정 형편이 딱한 점 등에 비추어 원심의 선고 형량이 지나치게 무겁다”며 징역 1년 6개월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하고 석방했다.

이춘재가 다시 9차 사건의 마각을 드러낸 것은 석방 7개월 후인 1990년 11월 15일이었다. 이춘재는 그날 오후 학교에서 귀가하던 여중생(13세)을 성폭행한 후 살해했다. 그리고는 숨진 학생의 몸에 면도칼로 난행을 하고 신체에 볼펜, 도시락 포크, 수저 등을 삽입하는 엽기 행각을 벌였다. 이 사건은 연쇄살인 사건 중 가장 잔혹한 범행으로 꼽힌다. 시신은 이튿날 오전 스타킹으로 두 손과 두 발이 묶이고 브래지어로 재갈이 물린 상태로 태안읍 병점5리 야산에서 발견되었다. 이춘재는 9차 사건 후 5개월이 지난 1991년 4월 3일 오후 9시, 수원 딸 집에 갔다가 버스에서 내려 귀가하던 67세 할머니를 살해하는 10차 사건을 저질렀다. 할머니는 스타킹에 목이 감겨 숨진 상태로 다음날 동탄면 반송리에서 발견되었다. 10차 사건을 마지막으로 화성의 연쇄살인은 더 이상 일어나지 않았다.

이춘재의 범행 일지

 

각종 기록과 용의자들의 죽음

화성 연쇄살인 사건은 전대미문의 사건인 만큼 경찰사에 각종 진기록을 남겼다. 수사에 동원된 경찰은 연인원 205만 명으로 단일 사건으로는 가장 많았다. 용의자로 오른 수사 대상자는 2만 1000여명, 지문 대조는 4만여건, DNA 감정은 570건, 모발 감정은 180건이나 되었다. 용의자로 수사를 받다 다른 범죄가 드러나 붙잡힌 사람도 1495명에 달했다. 그런데도 경찰은 살인마의 정체를 밝혀내지 못했다.

화성 연쇄살인 사건의 죽음은 피해자에서 그치지 않았다.  7차 사건 용의자로 지목된 남자는 목을 매 자살하고 4차 사건의 용의자로 떠오른 남자는 시름시름 앓다가 1996년에 죽었다. 1988년 용의자로 몰렸던 청소년은 고문 끝에 숨졌으며 1990년 용의자로 조사를 받다 풀려난 2명은 각각 열차에 뛰어들어 자살하거나 교통사고로 유명을 달리했다. 이 때문에 담당 형사가 구속되고 직위해제되었다.

경찰에도 수난이 이어졌다. 7차 사건 당시 수사에 참여했던 한 경찰은 뇌출혈로 쓰러져 불구가 되고, 8차 사건 당시 애꿎은 윤여성을 구속하는데 결정적 공을 세웠던 경찰은 훗날 교통사고로 숨졌다. 이춘재가 범인으로 밝혀진 2019년 12월에도 이춘재 수사 경찰 중 한 명이 모텔에서 숨진채 발견되었다.

 

■ 처제 살인과 무기징역

 

이춘재는 연쇄살인 사건의 주요 무대인 경기 화성군 진안리에서 1963년 태어나 자랐다. 인근의 초등학교와 중학교를 졸업해 지리에 밝았다. 구석구석 모르는 곳이 없었다. 10건의 연쇄살인 사건이 발생한 1986~1991년에도 그곳에 거주했다. 10건의 사건 중 8건은 이춘재 집이 있는 화성군 태안읍 진안1리(현재 화성시 진안동)에서 불과 반경 3㎞ 안에서 발생했다. 6차 사건 발생 장소는 직선거리로 불과 50m도 채 안 되는 뒷산이었다. 8차 사건의 피해자인 중학생은 한동네에 살던 이웃 동생이었다.

이춘재의 군 복무 시절 사진 (출처 SBS ‘그것이 알고싶다’)

 

이춘재는 9차 사건 후 충북 청주를 오가며 일을 하다가 10차 사건(1991년 4월) 후 충북 청주의 골재 채취 회사에서 굴착기 기사로 일을 했다. 그러다가 그 회사 경리로 일하던 아내를 만나 1991년 7월 혼인신고를 했다. 이듬해 아들도 낳았다. 그러나 이춘재는 어린 아들을 방 안에 가두고 때리거나 아내에게 재떨이를 던지는 등 가정 폭력을 일삼았다. 성적으로도 학대했다. 결국 아내는 가출했다.

이춘재는 1994년 1월 13일 충북 청주시 복대동 자신의 집에 찾아온 처제(당시 20세)가 마시는 음료수에 수면제를 타 먹인 후 잠자는 처제를 성폭행하고 둔기로 때려 실신시킨 뒤 목 졸라 살해했다. 시신은 집에서 880m가량 떨어진 곳에 버렸다. 1심과 2심 재판부는 사형을 선고했으나 대법원에서 “성폭행 이후 살해까지 계획적으로 이뤄졌는지가 불분명하다”는 이유로 파기환송해 이후 무기징역으로 감형되었다. 물론 당시 재판부는 이춘재가 수원·화성에서 10차례나 살인행각을 벌인 살인마라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이춘재가 교도소에 수감 중이니 화성 연쇄살인 사건도 더 이상 일어나지 않았다. 이로써 화성 연쇄살인사건은 영원히 ‘살인의 추억’으로 남고 말았다. 연쇄살인이 더 이상 일어나지 않자 1996년 화성 사건을 소재로 한 연극 ‘날 보러 와요’가 공연되었다. 이것을 영화로 만든 ‘살인의 추억’(2003년 4월 개봉)은 521만 명을 극장으로 끌어들였다.

 

■ 이춘재의 자백으로 밝혀진 추가 사건 4건

 

이춘재는 처제 살해 후 수감 중인 부산교도소에서 1급 모범수 생활을 이어가며 가석방을 노렸다. 동생에게는 “곧 가석방될 것”이라고까지 말했다. 하지만 이춘재의 바람은 곧 물거품이 되었다. 2019년 연쇄살인 사건의 유류품 일부에서 이춘재의 DNA가 검출되었기 때문이다. 경찰은 이춘재가 자백을 시작한 2019년 9월부터 2020년 4월까지 50여차례 접견조사를 벌여 이춘재가 14건의 살인, 34건의 강간을 벌인 것을 일일이 확인했다. 그리고 2020년 7월 수사 결과를 발표했다. 첫 번째 살인사건이 발생한 1986년 이후 34년 만이다.

발표에 따르면 이춘재는 1986년 9월부터 1991년 4월까지 화성·수원·청주 지역에서 모두 14건의 살인을 저질렀다. 1994년 청주 처제 살인 사건까지 포함하면 8년간 15명을 살해했다. 이춘재는 살인 말고도 34건의 성폭행 또는 강도 범행을 저질렀다고 털어놨다. 그러나 경찰은 34건 중 입증자료가 충분한 9건만 이춘재의 소행으로 결론을 내렸다. 나머지는 뚜렷한 증거가 없고 일부 피해자가 진술을 꺼려 제외했다. 경찰은 “성적 욕구불만을 해소하기 위해 범행을 시작했다가 가학적인 사이코패스형 범죄자가 되었다”고 분석했다.

10건의 연쇄살인 말고도 이춘재 자백으로 알려진 4건은 이 글에서 편의상 ‘추가 사건’으로 분류한다. ‘추가 사건 1차’에 해당하는 수원 여고생 살인 사건은 화성 6차 사건(1987.5)과 7차 사건(1988.9) 사이인 1987년 12월 24일 수원 화서동에서 발생했다. 시신은 실종 후 열흘 만인 1988년 1월 4일 화서전철역 부근 논에서 발견되었다. 스타킹으로 양손이 뒤로 결박당하고 속옷으로 입에 재갈이 물리는 등 화성 연쇄 사건과 수법이 비슷했다. 경찰은 사건 지역이 수원이어서 화성 연쇄 사건과 연결짓지 않았다.

 

‘추가 사건’ 3차와 4차는 청주에서 발생

태안읍에 살던 초등학생 김모양(7세)이 낮에 학교 수업을 마치고 귀가하다 실종된 ‘추가 사건 2차’는 8차(1988.9)와 9차 사건(1990.11) 사이인 1989년 7월 7일 일어났다. 피해자의 아버지는 납치·실종 신고를 했으나 경찰은 한 달 정도 수사를 하다가 실종으로 처리하고 중단했다. 이후 김양의 행방은 파악되지 않고 있다가 사건이 일어나고 약 5개월이 지난 12월 20일 태안읍 병점5리의 야산에서 실종 당시 입었던 블라우스와 치마, 책가방만 발견되었다. 그러나 당시 수사 경찰은 유류품 발견 사실을 가족에게 알리지 않았다. 수색에 참여한 주민이 “줄넘기에 결박된 양손 뼈를 발견했다”고 진술했지만, 이것도 무시했다. 시신은 끝내 발견되지 않았다.

‘추가 사건’ 3차와 4차는 청주에서 발생했다. 이춘재는 9차 사건과 10차 사건을 화성에서 벌이면서도 굴착기 공사를 위해 오가던 충북 청주에서도 2건의 살인 행각을 벌였다. 1991년 1월 26일 오후, 청주의 한 공장에 근무하며 야간 고교를 다니던 박모(15세)양을 공사현장으로 납치해 성폭행하고 살해한 뒤에는 복대동 택지 조성 공사 현장 콘크리트관 속에 넣었다. 시신은 속옷으로 입이 막히고 양손이 뒤로 묶인 상태로 발견되었다. 당시 경찰이 붙잡은 용의자는 증거 부족 등의 이유로 무죄판결을 받았다. 이 역시 경찰의 무리한 수사였음이 이춘재의 자백으로 확인되었다. 이춘재는 추가 사건 3차를 벌이고 한 달이 조금 지난 3월 7일에도 청주시 남주동 주택에서 20대 여성을 흉기로 찔러 살해했다. 시신은 양손이 묶이고 입에 재갈이 물린 채 발견되었다.

 

■ 경찰의 부실 수사

 

경찰은 6차 사건(1987.5) 이후에 발생한 초등생 강간사건과 1988년 9월 화성 8차 사건, 1989년 7월 발생한 초등생 실종사건(추가사건 2차) 등 3건의 사건과 관련해 이춘재를 수사 용의선상에 올렸었다. 하지만 ‘구체적 증거가 없다’ ‘현장 음모와 혈액형 및 형태적 소견이 상이하다’ ‘족장(255㎜)과 이춘재의 족장(265㎜)이 불일치한다’는 이유로 용의선상에서 배제했다. 이는 그만큼 경찰의 부실 수사가 심각했다는 것을 방증하는 결과다.

특히 혈액형이 문제였다. 당시 경찰은 용의자의 혈액형을 B형으로 봤다. 그러나 이춘재의 혈액형은 O형이다. 당시 수사에 따르면 2차(1986.10), 4차(1986.12), 5차(1987.1) 사건 현장에서 발견된 체모·체액 등에서 B형 혈액형이 나왔다. 9차(1990.11)와 10차 사건(1991.4)에서도 B형이 나오면서 확신이 굳어졌다. 이 때문에 다른 혈액형은 용의자에서 배제했다.

경찰은 수사과정에서 범인의 윤곽에 접근한 적이 있었으나 그 역시 살리지 못했다. 3차 사건이 일어나기 10여일 전 밤에 논길을 지나던 40대 주부가 한 남자에게 인근 논둑으로 끌려가 성폭행을 당했으나 범인이 한눈을 파는 사이 달아나 가까스로 목숨을 건진 일이 있었다. 여성의 증언에 따르면 범인의 나이는 20대 중반으로 키 165~170㎝의 호리호리한 몸매에 저음의 목소리였다. 범인 모습은 1988년 9월 7일에 있었던 7차 사건의 용의자를 시외버스에 태운 운전기사와 안내양의 진술과 거의 일치했다. 경찰은 안내양과 버스 기사의 증언 등을 근거로 ‘신장 165~170㎝, 오똑한 코에 날카로운 눈매의 24~27세 남자’의 몽타주를 그려 전국에 수배했다. 이 몽타주는 2019년 이춘재와 비교해보면 얼굴이 비슷한 것을 알 수 있다. 하지만 경찰은 범인 검거에 실패했고 범인은 경찰의 수사를 비웃으며 거리를 활보하고 다녔다. 이춘재는 2020년 11월 열린 재심 법정에서 “당시 경찰 수사가 제대로 이뤄졌다면 용의선상에 올랐을 것이다. 보여주기식 수사를 한 것 같다”고 말해 경찰의 부실수사를 비판했다.

 

■ 이춘재에 대한 윤여성의 복잡한 심경

 

윤여성은 제대로 걷지도 못하는데 화성 8차 사건의 성폭행 살인범으로 몰린 것에 대해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시대의 희생양이라고 생각한다. 1980년대 후반에 경찰이 범죄자 하나 만들어내는 건 일도 아니었다. 만약 내가 ‘그 사건을 저지르지 않았다’고 끝까지 버티면, 아마 사형당해 지금 이 자리에 없을 것이다. 초등학교 3학년도 못 마치고, 공장에서 일하다 보니까 내가 만만해 보여서 경찰이 그랬다고 생각한다. 나를 용의자로 지목하려고 치밀한 계획을 세웠을 것이다.”

“진범인 이춘재가 잡혔다는 소식을 듣고 정말 기뻤겠다”는 기자의 질문에 대해서는 “솔직히 말하면 그 소식 들었을 때 ‘제발 8차 사건만 피해가라’고 생각했다. 믿기지 않겠지만 ‘제발 조용히 넘어가자’는 게 진짜 내 심정이었다. ‘8차 사건’이 다시 이슈화가 되면, 나와 내 가족들이 또 시달릴 테니까. 30여년간 하도 시달려서 그런 생각을 했다.” 그러면서 “이춘재에게 복잡한 감정이 있다. 이춘재가 이번에 자백하지 않았다면, 여전히 나는 살인범으로 살아가고 있지 않을까라는 생각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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