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승희의 생몰이 정확히 알려진 것은 2003년 초 북한 TV가 애국열사릉에 있는 그의 묘비를 보도하면서였다. 묘비에는 ‘1911년 11월24일 생, 1969년 8월8일 서거’로 씌어있다. 최승희를 무용으로 이끈 것은 1926년 15세에 처음 접한 일본 근대무용의 선구자 이시이 바쿠의 서울공연이었다. 이시이를 따라 도일, 문하생으로 3년간 무용을 배우고 돌아온 최승희는 1929년 서울 남산 중턱에 ‘무용예술연구소’를 열고 이듬해에는 제1회 신작발표회를 경성공회당에서 가져 한국 현대무용의 태동을 알렸다.
1931년 프롤레타리아 문학운동가 안막과 결혼하고 1933년 다시 일본으로 건너간 최승희는 무용가로서의 최절정기를 그곳에서 맞았다. 여세를 몰아 1938년부터 시작된 3년간의 해외공연은 가는 곳마다 대성황을 이뤄 ‘동양의 진주’라는 찬사가 쏟아졌다. 미국, 유럽, 남미 등 각국을 순회하며 최승희의 존재를 알리는 과정에서 세계적인 무용가 마사 그레이엄과는 합동공연을 하고 찰리 채플린, 피카소, 장 콕토 등과는 친교를 맺었다.
그러나 해외공연을 마치고 돌아와서는 1941년 말 전선으로 내몰렸다. 광복 때까지 계속된 일본군 위문공연은 그에게 낙인같은 ‘친일’ 딱지를 붙여주었다. 때문에 그는 남북 양쪽에서 외면당하는 신세가 됐다. 친일 전력은 그를 월북으로 내몰았고, 북한 역시 그를 한때 인민배우로 이용하다 반혁명예술가로 내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