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찍이 아시아의 황금시기에/ 빛나던 등불의 하나인 코리아… 나의 마음의 조국 코리아여 깨어나소서.” 실의에 빠져있는 한국인을 위해 기꺼이 ‘동방의 등불’(1929년 4월)이라는 시 한 편을 써주었던 ‘인도의 시성(詩聖)’ 라빈드라나드 타고르가 1941년 8월 7일 향년 80세로 고향 캘커타(현재 명칭 콜카타)에서 숨을 거뒀다. 타고르는 그의 조국 인도처럼 식민 치하에서 신음하는 한국인이 안타까웠는지 ‘동방의 등불’ 이전에도 최남선의 요청으로 3·1운동 실패에 좌절해 있는 한국인에게 ‘패자의 노래’로 격려한 바 있다.
브라만 계급 대지주의 열 네번째 아들로 태어난 타고르는 15살에 시집을 낼 정도로 어려서부터 문학에 재능을 보였다. 한때는 ‘산지바니 사바(회생단)’라는 비밀결사에 가담, 독립투쟁에 뛰어들었지만 40대 중반 부터는 간디와 함께 펼치던 정치운동을 중단하고 경건한 종교시인의 길을 걸었다. 그의 대표적인 시집 ‘기탄잘리’(1909년)가 벵골어로 출판된 것도 이 무렵이었다. 영국 시인 예이츠가 서문을 쓴 영문판(1912년)은 이듬해 “수천년 이어진 인도 사상의 정수를 유럽의 근대정신과 화합시킨 인류사적 업적”이라는 찬사와 함께 아시아인으로는 첫 노벨문학상을 수상하는 영예를 안겨주었다.
이 공로로 영국으로부터 기사작위를 수여(1915년)받았으나 ‘암리차르 학살 사건’(1919년)에 항거하는 뜻으로 작위를 반납했다. 노벨상 상금도 농촌재건을 위해 쓰여졌다. 타고르는 1000곡 이상의 가곡을 작곡하고 파리에서 회화전을 열 정도로 음악과 미술 분야에서도 뛰어난 재능을 보였다. 현재 인도의 국가(國歌)도 그가 작사·작곡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