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7년 7월 31일 늦은 밤, 대한제국 황제 순종이 군대해산을 명하는 조칙을 내렸다. 비용절감을 위해 군대를 일시 해산한다는 것이 표면적인 이유였지만 실은 1주일 전에 체결된 한․일신협약(정미7조약) 비밀각서에 의해 이미 예고된 것이었다. 조칙도 이토 히로부미와 이완용이 위조한 것으로 훗날 밝혀졌다.
헤이그 밀사 사건을 빌미로 고종을 강제퇴위시킨 일제는 대한제국의 군사․사법권의 무력화를 시도했고, 그같은 계획의 일환으로 군대해산이 강행됐다. 8월 1일 오전 10시, 서울 지역을 지키고 있는 대한제국 군대가 영문도 모른 채 동대문 밖 훈련원에 소집됐다. 군부협판 한진창이 군인들 앞에 나타나 새 국왕으로 등극한 순종황제의 첫 조칙이라며 군대를 해산한다고 발표하자 어느새 그곳을 포위하고 있던 일본군은 우리 군대의 군모를 벗기고 계급장을 뜻어낸 뒤 해산을 종용했다.
이때 서대문에 있던 1연대 1대대장 박승환은 소집명령에 응하지 않고 있다가 군대해산 소식을 듣고는 울분을 참지못하고 자결했다. 부대원들은 남대문으로 뛰쳐나가 일본군을 상대로 대한제국 군대의 첫번째이자 마지막 전투를 벌여 70여 명이 전사하고 100여 명이 부상했다. 이날 봉기는 하룻만에 진압됐지만 이는 8월 2일부터 예정돼 있던 지방 8개 진위대의 해산 계획에 큰 차질을 빚게 해 전국적인 군대 항전의 도화선이 됐다. 일본측 통계에 의하면 1907년 8월부터 1910년까지 연인원 14만 6000여 명의 의병이 2820회나 되는 항일전투를 전개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 기간 1만 6700여 명이 전사하고, 3만 6880여 명이 부상했다. 조국을 되찾으려고 무려 5만 4000여 명의 의병들이 선혈을 뿌린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