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 오늘

美·日의 가쓰라·태프트 밀약

청(淸)의 황준헌 참사관이 쓴 ‘조선책략’은 ‘미국과 연대(연미·聯美)’할 필요성을 고종에게 제안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미국에 대한 고종의 기대는 1882년 조선이 서구 열강과 맺은 첫 조약 ‘조·미 수호통상조약’ 체결로 구체화됐다. 일본의 야욕이 점차 노골화되자 미국을 향한 고종의 해바라기는 부쩍 심해졌다. 1905년 9월 시어도어 루스벨트 미 대통령의 딸 앨리스가 약혼자와 함께 해군대장을 대동하고 조선을 방문하자 민영환·이준·이상재 등이 앨리스를 몰래 만나 조선이 처한 현실을 루스벨트에게 알릴 수 있는 특사파견을 제의했다. 지푸라기라도 잡고싶은 심정이었다.

앨리스는 이를 승낙했고 고종은 헐버트를 밀사로 파견했다. 헐버트가 미국에서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하기 전 을사조약(1905년 11월)이 체결돼 민영환은 자결하고 헐버트의 노력도 수포로 돌아갔지만, 고종과 헐버트는 정작 중요한 사실을 그때까지도 알지 못했다. 앨리스가 방문하기 전인 1905년 7월 29일 이미 ‘가쓰라·태프트 밀약’이 체결돼 미국은 더 이상 의지할 대상이 아니라는 사실이었다. 1924년까지 양국이 밀약을 극비에 붙였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만큼 국제정세에도 어두웠다.

밀약은 루스벨트가 도쿄로 파견한 미 육군장관 태프트와 일본 총리 가쓰라 다로(桂太郞) 간에 체결됐다. 미국은 필리핀 지배권을 보장받는 대신 조선의 지배권을 일본에 넘긴다는 내용이었다. 이어진 제2차 영일동맹(8월 12일)과 러일강화조약인 포츠머스조약(9월 5일)으로 일본은 열강의 승인 하에 한국에 대한 보호조약을 공공연하게 강요할 수 있게 됐다. 그리고 11월 17일 회유와 협박으로 을사조약이 체결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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