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토리박스

‘가쓰라·태프트 밀약’의 전말… 해석은 법적 의무 지닌 ‘협정’과 의견 교환한 ‘비망록·각서’로 엇갈려

↑ 밀약의 두 당사자 윌리엄 태프트(왼쪽)와 가쓰다 다로

 

by 김지지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선후보가 11월 12일 존 오소프 미국 상원의원을 만나 “일본에 한국이 합병된 이유는 미국이 가쓰라-태프트 협약을 통해서 승인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결국 나중에는 분단도 역시 일본이 분할된 게 아니라 전쟁 피해국인 한반도가 분단되면서 전쟁의 원인이 됐다는 점은 전혀 부인할 수 없는 객관적 사실”이라고 밝혔다. 가쓰라-태프트 밀약에 대해 알아본다.

 

러일전쟁으로 백척간두의 위기로 내몰린 고종의 첫 대미 특사는 이승만

1904년 2월 발발한 러일전쟁의 전세가 일본으로 기울어 조선의 상황이 백척간두의 위기로 내몰렸다. 그러나 고종은 22년 전 미국과 체결한, ‘제3국이 한쪽 정부에 부당하게 또는 억압적으로 행동할 때에는 다른 한쪽 정부가 원만한 타결을 위해 주선한다’는 조미수호통상조약(1882) 제1조에 실낱같은 희망을 걸었다. 고종의 첫 대미 특사는 이승만이었다. 이승만은 1899년 1월 고종 폐위 음모 사건에 연루되어 5년 7개월간 한성감옥에 투옥되었다가 1904년 8월 특별사면령을 받고 감옥에서 풀려나 그해 11월 미국 하와이로 출국했다. 이승만은 하와이의 한인 동포들과 함께 시어도어 루스벨트 대통령에게 조선의 사정을 호소할 방법에 골몰했다.

그 무렵 한반도를 둘러싼 열강 간의 각축전이 더욱 요동치는데도 조선의 조정은 세계 정세가 어떻게 흘러가는지도 모른 채 연방 헛발질에 여념이 없었다. 국제 정세에 무지하기는 미주 동포들도 마찬가지였다. 1905년 7월 미 육군성 장관 윌리엄 태프트가 일본 방문길에 하와이를 경유했을 때 우리 교민들은 그가 무슨 임무를 띠고 일본으로 가는지조차 알지 못한 채 우리 교민들이 루스벨트 대통령을 만날 수 있는 소개장을 써준 데 대한 답례의 표시로 환영회를 열어주었다.

일본을 방문 중인 윌리엄 태프트(뒤 중앙)와 앨리스 공주(앞 가운데)

 

이승만은 태프트의 소개장을 가지고 하와이 교민 대표 윤병구 목사와 함께 1905년 8월 4일 루스벨트 대통령이 휴식을 취하고 있는 뉴욕 롱아일랜드의 여름 백악관을 찾아가 독립청원서를 전달하고자 했다. 그러나 루스벨트는 공식 외교 경로로 청원서가 접수되면 8월 10일 시작될 포츠머스 회담 의제로 올리겠다고만 말할 뿐 더 이상의 언질은 주지 않았다. 이승만은 면담이 성공했다고 판단해 워싱턴 주재 대리공사 김윤정에게 독립청원서를 루스벨트에게 공식 전달해 줄 것을 요청했다. 하지만 이미 친일로 기운 김윤정은 고종에게서 명령이 오지 않았다며 청원서 제출을 거절했다. 설사 청원서를 제출했더라도 태프트 장관이 이미 일본 총리 가쓰라 다로와 1905년 7월 29일 이른바 ‘가쓰라·태프트 밀약’을 주고받은 상태였기 때문에 별 소용이 없었다.

 

당시 조선은 국제 정세에 까막눈

당시 일본을 방문한 태프트 일행에는 루스벨트의 큰딸 앨리스도 있었다. 그는 일본에서 태프트와 떨어져 중국을 거쳐 1905년 9월 미국 해군대장을 대동하고 약혼자와 함께 조선을 방문했다. 앨리스는 당시 상황을 “한국인은 슬프고 풀이 죽어 있었다… 고종과 황태자(순종)와 오찬을 했다. 열흘간 머무르는 동안 공식 환대가 지겨울 정도였다”고 주위 사람에게 전했다. 고종이 보인 환대는 민망스러울 정도였다. 고종은 앨리스가 도착한 이튿날 앨리스 일행을 접견하고 오찬을 베풀었다. 일행이 지나는 큰길가에는 사람이 빽빽이 늘어서서 청홍의 장명등과 성조기를 흔들었다.

앨리스의 대한제국 방문을 보도한 프랑스 르 프티 파리지앵지(1905년 10월 8일자)

 

고종의 환대는 어떻게든 미국의 지원을 얻으려는 안간힘의 표시였으나 ‘가쓰라·태프트 밀약’이 이미 작성되고 8월 말 ‘포츠머스 조약’의 윤곽이 잡힌 뒤였기 때문에 사실상 헛수고였다. 그런데도 이런 사실을 모른 채 민영환, 이준, 이상재 등을 엘리스에게 보내 조선이 처한 현실을 루스벨트에게 호소할 특사 파견을 제의하게 했으니 국제 정세에 이런 까막눈도 없었다. 게다가 고종은 앨리스가 승낙했다고 기뻐하며 호머 헐버트를 대미 밀사로 파견하기까지 했다.

1905년 10월 민영환을 비롯한 몇몇 대신은 비공식 회의를 열고 조선 정부의 유일한 대책은 미국의 협력을 얻는 것뿐이라는 결론을 내리고 그러한 내용을 담은 고종의 친서를 헐버트를 통해 미국 대통령에게 전달하기로 했다. 고종은 친서에서 조미수호통상조약 제1조의 ‘거중조정’ 조항에 의거해 미국이 나서서 ‘한일의정서’를 파기하고 열강의 공동 보호를 통해 일본의 침략을 견제해 달라고 요청했다. 그러나 헐버트가 1905년 11월 미국 워싱턴에 도착했을 때 조선에서는 하루 전 이미 을사조약이 체결된 상태여서 헐버트의 노력도 수포로 돌아갔다. 게다가 미국 정부의 반응도 싸늘했다. 루스벨트는 헐버트에게 외교 사항이므로 국무부로 가라면서 접견을 거절했고, 국무장관 엘리휴 루트는 바쁘다는 핑계로 차일피일 미루다가 에드윈 모건 주한 미국 공사에게 공사관의 철수를 훈령하고 난 다음날인 11월 25일 헐버트를 만나주었으나 냉랭하게 대했다.

고종은 헐버트를 미국에 파견하고도 대미 교섭을 강화하겠다며 또다시 민영환의 동생인 주프랑스 공사 민영찬을 미국에 급파했다. 민영찬은 12월 11일 루트 장관을 만나 고종의 뜻을 전했다. 그러나 민영찬이 루트를 만난 닷새 뒤인 12월 16일, 워싱턴 주재 대리공사 김윤정이 외부대신 임시서리 이완용에게서 주미 한국공사관의 문서 및 그 밖의 재산을 일본공사관에 이양하라는 훈령을 받았다는 사실을 루트에게 통보함으로써 모든 대미 밀사 교섭은 끝나고 말았다. 김윤정은 공사관을 일본공사관에 넘겨주고 귀국했다.

루스벨트(왼쪽)와 태프트

 

비밀에 부쳐졌던 밀약 내용이 공개된 것은 19년 후인 1924년

사실 미국과 일본은 러일전쟁 초부터 서로 신뢰하는 관계였다. 루스벨트는 동아시아의 국제정치적 역학 관계를 고려할 때 러시아가 미국의 중국 진출에 장애가 될 것으로 생각했다. 따라서 조선을 속국화하려는 일본의 이권을 어느 정도 보장해주면서 일본을 러시아에 대한 방패막이로 삼을 수만 있다면 미국으로서는 더 이상 바랄 것이 없었다. 그렇다고 일본이 러시아를 완패시켜 동아시아의 균형이 깨지고 일본이 동북아를 독점하는 것도 원치 않았다. 이런 미일 간 우호 관계 속에서 1905년 7월 27일 윌리엄 태프트 육군성 장관이 일본 도쿄에서 가진 가쓰라 다로 총리와의 장시간 비밀회담 끝에 밀약을 체결한 것이니 놀라울 것도 새로울 것도 없었다.

가쓰라는 회담에서 “대한제국 문제가 러일전쟁의 직접적 원인이므로 전쟁 후에도 대한제국을 그대로 두면 또다시 여러 나라와 협정 혹은 조약을 맺어 전쟁 전과 똑같은 국제적 갈등을 유발할 것이기 때문에 일본은 그 가능성을 미리 배제할 어떤 명백한 조치를 취할 필요를 느낀다”고 견해를 밝혔다. 태프트는 가쓰라의 의견에 동조하면서 “자신할 수는 없지만 루스벨트 대통령도 가쓰라의 관점에 동의할 것”이라는 개인적 의견을 피력했다.

태프트는 가쓰라와 나눈 대화 내용을 ‘서로 합의한 비망록’(agreed memorandum, 7월 29일로 명기)이라는 제목으로 정리해 미국의 루스벨트에게 보고했다. 루스벨트는 7월 31일 태프트에게 보낸 답신에서 “가쓰라와 나눈 대화는 전적으로 옳다. 가쓰라에게 당신이 말한 모든 내용을 내가 확인한다는 것을 말해주기 바란다”고 훈령했다. 일본으로서는 공식 조약은 아니더라도 대한제국 보호국화에 대한 미국의 동의를 충분히 획득했다고 믿을 만한 것이었다. 밀약의 주요 내용은 3가지였다. ▲당시 미국이 점령하고 있는 필리핀에 대해 일본이 어떠한 공세적 의도도 갖고 있지 않음을 확인하고 ▲일본 측이 제안한 일본·영국·미국 간 비공식 동맹에 대해 태프트가 미국 의회의 승인없이 ‘조약적 의무’를 갖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밝히고 ▲조선에 대한 일본의 지배권이 러일전쟁의 논리적 귀결이라는 일본의 의견을 미국이 인정한다는 내용이었다.

비밀에 부쳐졌던 회담 내용이 세상에 공개된 것은 19년이 지난 1924년 미국의 외교사학자 타일러 데닛의 논문에 의해서였다. 데닛이 미국 국회도서관에서 우연히 발견한 비망록을 토대로 논문을 써 1924년 8월 미국 정치학회에서 발표함으로써 세상에 알려지게 된 것이다. 그런데 데닛은 태프트가 루스벨트 대통령에게 보낸 전문(電文)의 제목이 ‘비망록’인데도 ‘비밀협약(secret pact)’ ‘행정협정(executive agreement)’이라고 의미를 과장했다. 그러자 1959년 레이먼드 에스더스라는 학자가 데닛이 밀약처럼 보이게 하기 위해 일부러 뺀 전문 내용들을 복원해 비망록임을 밝혀냈다.

 

밀약은 두 가지 논쟁점 던져

오늘날 이 밀약은 두 가지 논쟁점을 던지고 있다. 첫째는 미국과 일본이 한국과 필리핀을 상호 교환하는 이른바 ‘외교적 주고받기 흥정’의 의미가 협상 내용에 담겨 있느냐는 점이고 둘째는 밀약을 단순히 양국 고위 관료 간의 의견 교환 즉 각서나 비망록으로 볼 것인지 아니면 양국 간 법적 의무를 지닌 협정으로 볼 것인지 하는 점이다.

첫째 논쟁점에 대한 그동안의 정설은 한국과 필리핀을 외교적 주고받기 흥정으로 삼았다는 것이다. 하지만 전문 내용만으로는 ‘A 대신 B’라는 논리가 선명하게 드러나지 않는다는 반론도 제기되고 있다. 정황상으로 당시 일본은 조선의 지배권 독점에 대한 국제적 승인이 필요했던 반면 미국은 1898년 이래 이미 필리핀을 군사적으로 점령한 상태였기 때문에 흥정의 대상이 될 수 없었다는 것이다. 물론 반론에 대한 반론도 만만치 않다. 즉 미국은 필리핀을 미국이 실제적으로 점령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욱일승천하는 일본의 군사력이 필리핀에 대한 야욕을 드러낼 것을 우려해 조선이라는 먹잇감을 주어 만주로 관심을 향하게 함으로써 일본이 태평양으로 눈독을 들이지 못하게 하려는 포석이었다는 것이다.

두 번째 논쟁점에 대해서도 양론이 팽팽하다. 밀약이 협정의 성격을 띠고 있다고 주장하는 측은 겉으로 드러난 형식보다는 국제정치적 관점에서 봐야 한다고 주장한다. 당시 루스벨트는 태프트가 보낸 전문을 읽고 난 즉시 태프트에게 보낸 회신에서 태프트의 발언을 대통령 자신의 의견처럼 인정하는 한편 가쓰라·태프트 밀약의 내용을 미국의 공식 견해로 재확인해 주었다는 것이다. 1905년 11월 을사조약이 체결되었을 때 가장 먼저 조선과 외교 관계를 단절한 국가가 미국이라는 사실도 이 주장에 무게를 실어주고 있다.

반면 단순히 ‘각서’로 간주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측은 협상 내용이 비밀에 부쳐졌다는 점, 구체적인 외교적 거래를 명시하고 있지 않다는 점을 근거로 내세운다. 또한 미일 쌍방의 누구도 서명하지 않고 양 당사국의 구속 조항도 없기 때문에 단순한 대화의 기록이라는 것이다. 비망록 본문에 ‘다음과 같은 시각이 교환되었다’라고 씌어 있는 것도 조약이 아닌 각서의 근거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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