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 오늘

6·25 정전협정 조인

1953년 7월 27일 오전10시, 한국전쟁에 마침표가 찍혔다. 765차례의 회담 끝에 마침내 정전협정이 체결된 것이다. 난항을 보이던 정전 협상에 돌파구가 마련된 것은 스탈린 사후(1953년 3월) 공산 측이 부상병 포로를 우선교환하자는 데 합의했기 때문이다. 아이젠하워 대통령도 “정전협정 후라도 한국을 계속 방위하겠다”고 이승만 대통령을 안심시키며 협상을 촉구했다. 하지만 4월 12일 이 대통령이 ‘휴전반대 단독북진’을 주장하면서 협상에 차질이 빚어졌다.

6월 8일 미국과 공산 측 간에 포로교환협정이 체결되자 이 대통령은 6월 18일 반공포로 2만 7000명을 일방적으로 석방하는, 미국의 뜻과 배치되는 행보를 보였다. 다른 한편으로는 한국정부가 휴전협정에 동의하는 조건으로 한미상호방위조약체결, 중국군 즉시 철수, 제네바 정치회담의 시한설정 등 3개항을 제시했다. 사태 해결의 기미가 보이지 않자 아이젠하워는 ‘한미상호방위조약 연내 체결’을 제시, 7월 24일 이 대통령으로부터 휴전협정 동의를 끌어냈다.

조인은 유엔 측 대표 해리슨 중장과 북한 대표 남일 대장이 한국어·영어·중국어로 씌어진 전문5조 36항의 협정문서 정본 9통, 부본 9통에 각각 서명함으로써 이뤄졌다. 시계는 10시12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클라크 유엔군 사령관, 김일성 조선인민군 최고사령관, 팽더화이(彭德懷) 중국인민지원군 총사령관은 각각 후방에서 협정문서에 서명했다. 한국 측의 서명은 없었다. 그리고 밤 10시, 한반도 전역에서 총성이 멎었다. 250만 명의 한국인, 100만 명의 중국인, 5만 4000명의 미국인 등 400만 명에 이르는 사망자를 낸 비극적인 전쟁이 휴전으로 잠시 멈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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