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 오늘

일본의 다나카 가쿠에이 전 총리, 록히드 사건으로 구속

↑ 다나카 가쿠에이

 

‘록히드 사건’은 1976년 2월 4일 미 상원 다국적기업소위원회(일명 처치위원회)에서 “미국의 록히드사가 자사 비행기를 판매하기 위해 일본의 정부고관에 거액의 뇌물을 주었다”는 사실이 폭로되면서 불거졌다. 사건이 알려지자 일본 열도는 발칵 뒤집혔다. 여론은 진상규명을 요구하며 들끓었고 국회는 청문회를 열어 관련자들을 소환했다. 검찰도 수사에 착수, 관련 기업인들을 구속하며 다나카 가쿠에이(田中角榮) 전 총리를 압박했다. 미키 총리까지 나서 사건규명에 적극적인 자세를 취했지만 다나카에 칼끝을 겨눈다는 것은 역시 부담스러운 일이었다.

그러나 관련 정보가 미국에서 노출되어 은폐 여지가 적고, 다나카 금맥과는 거리가 먼 ‘미스터 클린’ 미키가 총리였다는 점이 그나마 다행이었다. 마무리는 검찰 몫이었다. 검사들은 “책임은 내가 진다”는 검찰총장의 말을 방패막이로 삼아 수사에 총력을 기울였다. 그 결과 1976년 7월 27일, 마침내 다나카를 구속했다. 록히드사로부터 5억 엔을 받았다는 혐의였다. 다나카는 금방이라도 몰락할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다나카는 빈촌 출신에 변변치 못한 학력(초등학교 졸업)에도 수 십년 간 일본 정계를 쥐락펴락한 입지전적인 인물이었다.

구속된지 20일 만에 보석금을 내고 석방된 다나카는 기소 상태에서도 일본 정치를 요리했다. 그가 취한 유일한 자숙 행위는 형식적인 자민당 탈당 뿐이었다. 그는 자파를 결집시켜 오히라, 스즈키, 나카소네 등의 총리를 사실상 임명하며 ‘킹 메이커’ 역할을 계속했다. 그러나 1983년 10월 도쿄지법에서 징역 4년 선고를 받고 2년 뒤 심근경색으로 쓰러지면서 몰락은 시간 문제가 됐다. 1995년 2월 22일 대법원이 16명의 기소자 전원에게 유죄를 확정함으로써 사건은 19년 만에 종결됐다. 그러나 다나카는 1993년에 이미 죽어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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