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2년 7월 26일, 에바 페론이 죽었다. 사생아로 태어나 밑바닥을 전전한 끝에 27세라는 세계 최연소 나이로 영부인 자리에까지 올랐던 드라마같은 33년의 삶이었다. 1년 전 암선고를 받아 이미 예견된 죽음이었지만 에바 지지자들은 깊은 슬픔에 잠겼다. 조문 행렬은 3㎞나 늘어서고 국장(國葬)으로 치러진 장례는 전례없는 대규모였다.
유랑극단의 3류배우, 나이트클럽의 무명 댄서였던 에바의 인생이 전환점을 맞은 것은 24살이나 나이차가 나는 육군 대령 후안 페론을 만나면서였다. 에바는 아름답고 총명하면서도 야심에 찬 여성이었다. 페론이 군부에 잡혔다가 풀려날 때도, 대통령에 당선될 때도 에바는 조연이 아니라 사실상의 주연이었다.
페론이 대통령에 취임(1946년)하자 에바는 아예 노동부 건물에 사무실을 차려놓고 정치 일선에 뛰어들었다. 노동자들의 요구에 귀를 기울였고 하층민에게는 병원·고아원·학교를 지어주었다. 그의 선심 정책은 하층민으로부터는 폭발적인 인기를 끌었지만 반(反) 페론주의자들 눈에는 전형적인 선전·선동으로 비쳤다. 한쪽에서는 성녀였고 반대편에서는 악녀였다.
에바 사후, 아르헨티나는 우려한대로 서서히 혼란으로 빠져들었다. 곪아있던 환부도 터지기 시작했다. 3년 뒤 페론은 군부쿠데타로 망명길에 올랐다. 인플레이션과 부정부패, 민중선동과 탄압 등에 염증을 느낀 국민들의 정서가 반영된 결과였다. 에바의 시신도 능욕을 당했다. 군부가 시신을 탈취, 이탈리아로 빼돌린 것이다. 페론이 17년 만에 망명지에서 돌아온 1972년이 되어서야 에바도 비로소 편한 죽음을 맞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