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6년 5월 미소공동위가 결렬되면서 남한 내 정치 세력들은 둘로 갈렸다. 이승만을 중심으로 한 남한 단독정부수립론(단정론)과 김규식․여운형을 중심으로 한 중도파의 좌우합작운동이 그것이었다. 좌우합작운동은 5월에 좌우합작위원회를 구성하면서 세를 확대했고, 단정론은 1946년 6월 3일 이승만의 ‘정읍 발언’을 시발로 이리․서울․개성에서 연속적으로 제기됐다. 이미 북한의 소비에트화가 상당히 진전된 상태에서 미소공동위나 좌우합작위에 남한의 운명을 맡길 수 없다는 것이 이승만 정읍 발언의 배경이었다.
좌우를 망라한 임시정부 구성을 목표로 한 좌우합작위원회가 처음 회담을 연 것은 1946년 7월 25일이었다. 우파에서는 김규식․안재홍 등 5명이, 좌파에서는 여운형․이강국 등 4명이 참석해 합작 원칙까지는 합의했으나 좌파 쪽의 민주주의민족전선(민전)이 ‘미군정의 권한을 인민위원회에 넘기라’는 받아들일 수 없는 ‘합작 5원칙’을 발표하면서 회담은 더 이상 진전을 보지 못했다. 김규식과 여운형이 ‘합작 7원칙’을 발표하며 꺼져가는 불씨를 되살려보려 했지만 박헌영 등 좌파의 합작 거부와 이승만, 한민당 등 우파의 비토가 얽히면서 이마저도 무위로 끝나고 말았다. 공산당의 ‘9월 총파업’과 ‘10월 폭동’도 합작운동에 부정적인 영향을 끼쳤다.
게다가 좌우합작을 바탕으로 남북협상을 성사시켜 임시정부를 구성할 생각이었던 미군정이 합작위에 남조선과도입법의원 참여를 권고하고 합작위 역시 입법의원을 활용할 계산으로 미군정의 제안을 받아들이면서 합작위는 사실상 해체된 것이나 다름없었다. 입법의원은 이미 우파가 장악하고 있었고, 분위기도 ‘단정’으로 기울어진 상태였기 때문이다. 1947년 1월 입법의원의 반탁결의와 단정수립 촉구는 좌우합작파의 터전을 완전히 빼앗는 결과를 낳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