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 오늘

프랑스 비시정부 수반 앙리 필립 페탱 옥중 사망

프랑스 현대사에서 영욕의 교차가 가장 뚜렷한 인물을 꼽으라면 단연 앙리 필립 페탱이다. 그는 군인으로는 영웅이었으나 정치가로는 반역자였다. 1차대전 4년 간을 거치면서 대령에서 원수로 승승장구할 만큼 페탱은 뛰어난 군인이었다. 그에게는 늘 ‘베르덩 전투의 영웅’이라는 수식어가 따라 다녔다. 병사들에게도 페탱의 인기는 언제나 최고였다. 그가 지휘하면 죽을 확률이 적다는 이유에서였지만 성품도 온화했다.

국민적 영웅이 어느날 갑자기 반역자의 나락으로 떨어진 것은 히틀러가 1940년 6월 속전속결로 프랑스 국경을 돌파하면서였다. 정부가 남으로 후퇴하자 800만 명에 가까운 민간인들이 뒤를 따랐다. 대탈주극이었다. 사태 해결을 놓고 지도자들의 의견이 엇갈렸다. 휴전을 원하는 그룹에는 페탱이 있었고, 항전을 원하는 쪽에는 드골이 있었다. 총리의 사임으로 6월 16일 제3공화국의 제107번째 총리가 된 페탱이 6월 18일 라디오로 히틀러에게 휴전을 제의하자 드골은 이튿날 런던으로 망명, 철저 항전을 호소했다.

6월 22일, 페탱의 주도로 독일과 휴전했지만 사실상 항복이었다. 이로써 북쪽 프랑스에는 독일군이 주둔하고, 남쪽 프랑스에는 히틀러의 묵인 아래 전원도시 비시에 세운 ‘비시 정부’가 들어섰다. 7월 10일 프랑스 의회가 569대 80이란 압도적인 지지로 페탱에게 전권을 부여하자 비시를 수도로 한 새로운 정부 ‘프랑스국’이 탄생했다. ‘괴뢰정부’라는 것이 정설이지만 독일군에 의해 강제로 세워진 정권이 아니라 합법적 절차를 거쳐 세워진 자발적인 정부이기 때문에 괴뢰정부로 보지 않을 수도 있다는 주장도 있다.

어쨌거나 프랑스 젊은이들은 독일로 끌려갔고, 프랑스 기업들은 군수품을 생산했다. 전쟁이 끝나고 재판에 회부됐지만 페탱도 할 말은 있었다. 프랑스 남쪽이 그나마 독일군으로부터 파괴를 피할 수 있었던 것은 히틀러에게 협조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결국 국가반역죄로 사형을 선고받았으나 종신형으로 감형되어 수감생활을 하던 중 1951년 7월 23일 95세로 되섬에서 옥중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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