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난했던 시절, 오빠의 학비를 벌기 위해 기생이 될 수밖에 없었던 홍도가 대학생인 오빠 친구와 결혼하지만 시댁 식구의 박해로 쫓겨났다가 결국 살인미수까지 저지른다는 이야기. 여성 수난극의 전형이자 ‘한국형 ’최루(催淚)극의 원조’로 불리는 신파극 ‘홍도야 우지 마라’가 처음 무대에 올려진 것은 1936년 7월 23일이다. 동양극장이 첫 무대였고, 무대에 올린 것은 이 극장의 전속극단 청춘좌였다.
‘홍도야…’는 연출을 맡은 박진이 극작가 임선규가 처음 대본을 가져왔을 때 지나치게 신파조라며 내동댕이 치고, 임선규가 붙힌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이라는 제목이 극장 측에 의해 ‘사랑에 속고 돈에 울고’로 바뀌는 수난을 당하지만 곧 밀려드는 인파들로 최고 흥행을 기록하며 여성들의 눈물샘을 자극했다. ‘사랑에…’ 제목도 유랑극단들에 의해 임의로 바뀌어 일반에는 ‘홍도야…’로 널리 알려졌다. 1940년 김영춘이 노래하고 콜롬비아 레코드사가 제작한 ‘홍도야…’ 노래 역시 10만 장이나 팔려나가는 대히트를 기록했다.
1935년 11월, 서울 서대문구 충정로 지금의 문화일보 자리에 세워진 동양극장은 민간인 손으로 지어진 우리나라 최초의 연극 전용극장이었다. 2~3개의 전속극단으로 한달 4~5개의 작품을 무대에 올리며 1930년대 황금기를 구가했다. 1976년 3월 폐관할 때까지 우미관, 부민관과 함께 연극 영화의 본산 구실을 했다. ‘홍도’라는 여주인공 이름은 연극이 처음 공연될 때 당시 주인공을 맡았던 차홍녀의 이름 가운데자에서 따왔고 홍도 오빠 ‘철수’ 역시 당시 철수역을 맡았던 황철에서 따온 이름이다.
황철은 해방정국까지 ‘100년에 한번 나올까 말까한 배우’라는 찬사를 들었던 인기배우였다. 일제시대 최고 인기배우였던 문예봉의 남편이었던 극작가 임선규는 일제 말엽 친일연극 단체에 가담하거나 일본 고위관료와 친분을 맺는 친일행각을 보이다가 광복 후 친일이라는 형벌에서 벗어나기 위해 남로당 창당대회에서 연극을 발표하는 등 좌익 주변을 기웃거렸으나 정부가 수립되고 좌익 검거령이 떨어지자 1948년에 월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