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38년 예수살렘이 이슬람의 수중에 넘어갔어도 예루살렘에는 이슬람과 유대인이 공존했다. 술탄(왕)도 기독교 순례자들을 마다하자 않았다. 그러나 11세기 초 반기독교적인 칼리프 하킴이 등장하면서 이곳을 둘러싸고 갈등이 고조됐다. 그는 성지 순례자들의 출입을 금지하고 예루살렘 골고다 언덕에 있는 성묘교회까지 파괴하는 일을 서슴지 않았다. 성묘교회는 기독교인들에게는 성지의 상징이었고 성지 순례의 최종 목적지였다.
유럽 기독교인들이 격앙돼 있는 상태에서 기독교 세계를 위협하는 또 다른 주체가 역사 무대에 등장했다. 중앙아시아로부터 서진한 셀주크 투르크족이었다. 이들은 현재의 터키까지 세력을 확장했다. 1071년 전통적으로 이곳의 맹주였던 비잔틴 제국과 셀주크 투르크족이 충돌했으나 결과는 투르크족의 일방적인 승리였다. 그러나 1092년 셀주크 투르크족이 분열한 틈을 타 비잔틴 황제가 로마 교황 우르반 2세에게 도움을 청하면서 사태는 문명충돌로까지 확대 발전했다. 교황권의 위세를 높이고 비잔틴 교회까지 통합할 수 있는 기회로 판단한 교황은 1095년 11월 27일 프랑스 클레르몽에서 열린 공의회에서 3000여 명의 성직자들을 향해 십자군 운동의 필요성을 역설했다.
교황은 ‘성전(聖戰)’을 표방했으나 하급 기사들은 새로운 영토를 꿈꿨고 상인들은 경제적 이익을 쫓았다. 신앙심에 호기심, 모험심, 약탈욕까지 버무려진 제1차 십자군이 성지를 향해 출발한 것은 1096년 여름이었다. 장장 200년 동안 8차에 걸친 십자군 전쟁이 시작된 것이다. 종교전쟁이면서 동시에 탐욕스런 침략전쟁이었다. 주로 프랑크인과 노르만인들로 구성된, 비전투원을 포함한 5만 명 규모의 십자군은 3년이 지난 1099년 6월 예루살렘의 성벽 앞에 도착했다. 5주 동안 계속된 전투 끝에 7월 15일 마침내 예루살렘을 함락함으로써 예루살렘은 460년 만에 다시 기독교 세력권으로 들어왔다. 이어 피의 향연이 시작됐다. 무슬림이라면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살육됐다. 그러나 십자군이 이곳에 세운 예루살렘 왕국은 88년 후 다시 이슬람의 영웅 살라딘에 빼앗겼고 그들은 20세기가 될 때까지 이 땅을 밟을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