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준이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열리는 제2회 만국평화회의에 참가, 일제의 조선 침탈과 을사조약의 부당성을 세계에 알리고자 서울을 출발한 것은 1907년 4월 22일이었다. 전날 밤, 고종이 종친인 이준을 불러 “오늘밤 짐은 골육지친을 만나 국가 대사를 의탁하게 되니 기쁘기 한량없다”며 소회를 드러냈다. 부사(副使)였던 이준은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만난 정사(正使) 이상설과 함께 당시 러시아의 수도 페테르부르크로 가 이위종과 합류했다. 세 사람은 헤이그로 향하기에 앞서 러시아 황제에게 고종의 독립열망이 담긴 친서를 전달했다. 그러나 당시의 러시아는 러일전쟁 패배에 따른 포츠머스 조약으로 자국의 이해에만 관심을 가졌을 뿐 을사조약에 대해서는 냉담한 반응을 보였다.
회의가 개최되고 이미 열흘이 지난 6월 25일에서야 목적지에 도착한 세 사람은 대회 의장에게 고종의 친서와 신임장을 전하며 대회 참가를 요청했다. 그러나 의장국인 러시아 정부는 밀사가 도착하기 전에 이미 넬리도프 대회의장에게 접촉을 삼가라는 전문을 보내놓고 있었다. 의장은 일본을 의식해 면담조차 꺼렸고, 영일동맹의 두 당사자 일본과 영국은 훼방을 놓았다. 사무국이 조선 정부에 신임장을 조회하는 전보를 보냈으나 조선의 통신기관을 장악하고 있는 일본 통감부가 이에 응할 리 없었다.
세 특사는 할 수없이 각국 대표에게 호소문을 보내고 현지 신문을 이용해 국제여론을 환기시키려했다. 그럼에도 열강 대표들이 여전히 냉담한 반응을 보이자 이준은 통분을 참지못하고 분사(憤死)한다. 7월 14일이었다. 자결설·병사설·단식순절설 등 사인을 놓고 여러 설이 무성했지만 아직까지 정확한 사인은 밝혀지지 않고 있다. 헤이그의 옛 드용호텔에 2일간 안치됐던 시신은 7월 16일 이상설과 호텔주인에 의해 인근 공동묘지에 묻혔다가 1963년 서울 수유리에 안장됐다. 일제는 헤이그 밀사를 빌미로 5일 뒤에 고종을 강제퇴위시켜 놓고도 분이 안풀렸는지 이미 세상을 떠난 열사에게 궐석재판으로 종신징역을 선고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