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는 것이 힘! 배워야 산다” “가르치자! 나 아는대로” 90%에 달했던 문맹을 없애고 민족정신을 일깨우기 위해 추진된 문자보급운동이 그 개막을 알린 것은 1929년 7월 14일자 조선일보 사고(社告)였다. 이날자 조선일보는 ‘제1회 귀향남녀학생 문자보급반’이라는 제목의 사고를 통해 귀향 학생들이 각 고장에서 한글을 가르칠 것을 제안했다. 실적이 우수한 학생에게 줄 1000원(圓)의 장학금도 내걸었다. 방학을 맞아 귀향하는 409명의 학생들 손에는 1쪽짜리 한글교재 ‘한글원본’이 쥐어졌고, 이들로부터 한글을 깨우쳤다는 증명서를 쓴 사람은 2849명이나 됐다. 그러나 이 숫자는 91명의 학생에게서 배운 문맹자만 집계한 것이기 때문에 실제는 훨씬 많았다.
조선일보는 7월 29일부터 8월 31일까지 이들의 활동 상황을 22회에 걸쳐 대대적으로 보도하고, 약속대로 1등부터 5등까지를 가려내 장학금을 지급했다. 이듬해 참가교는 46개교로 늘어났고 이들에게서 문자를 깨우친 사람은 1만 567명에 달했다. 이 해에 조선일보는 더욱 충실해진 14쪽 자리 ‘한글원본’을 만들어 9만 부를 배포했다. 운동을 주도한 한글학자이자 지방부장인 장지영은 1930년 3월 18일부터 55회에 걸쳐 한글철자법강좌를 연재하며 문자보급에 불을 붙였다. 1931년에는 춘계 문자보급반 강좌를 개설하기로 하고 이를 관장할 기구로 문화부를 신설했다. 오늘날의 조선일보 문화부는 문자보급운동의 산물인 셈이다.
1931년 제3회 문자보급운동에는 1800명의 학생이 참가하고 한글원본 30만 부가 무료로 배포됐다. 이 해에만 2만 8000명이 한글을 깨우친 것으로 집계됐다. 당시 평양 숭실중학에 다니던 14세 소년 장준하도 이 운동에 참가했다. 동아일보도 1931년부터 4년간 농민들을 대상으로 ‘브나로드운동’을 전개하면서 문맹타파에 나서 조선일보와 선의의 경쟁을 벌였다. 조선일보는 내부사정으로 1932년과 1933년 2년 동안 문자보급운동을 중단해야 했으나 1934년에는 규모를 더욱 확대했다. 92개 중학과 33개 전문학교 및 대학에서 총 5078명이 참가하고 한글원본도 100만 부가 넘게 배포됐다. 당시 조선일보 발행부수는 3만 8000부였다. 그러나 문자보급운동과 브나로드운동을 못마땅하게 여긴 총독부가 1935년에 중지령을 내려 1930년대 최대 민중계몽운동이었던 양대 문화독립운동은 막을 내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