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 오늘

이순신 장군 한산도 대첩에서 일본군에 대승

1592년 4월 13일 오후 부산포 앞바다. 멀리 쓰시마 쪽 수평선에 검은 점이 보이기 시작하더니 점점 많은 수의 배들이 시야에 들어왔다. 임진왜란의 시작이었다. 개전 초기, 연전연승하고 있는 육지만큼이나 경상도 지역의 남해 바다도 일본 수군의 독무대였다. 조선 수군을 얕잡아 본 일본 수군이 점차 서쪽으로 이동하고 전라좌수사 이순신이 이끌고 있는 조선 수군 역시 남해안 동쪽으로 진출하면서 양측의 일전이 불가피했다. 그러나 일본 수군은 이순신의 상대가 되지 못했다. 5월에서 6월 사이에 옥포, 합포, 사천 등지에서 수십 척이 격파되면서 일본 수군은 부산 본거지를 제외한 곳에서는 발이 묶였다.

1592년 7월 8일 이른 아침, 일본 수군대장 와키사카에게 조선 수군이 접근하고 있다는 보고가 전해졌다. 육지에서 북상하던 중 일본 수군이 패전했다는 소식을 듣고 부리나케 되돌아 온 와키사카에게 조선 수군은 오합지졸일 뿐이었다. 그에게는 73척의 대함단이 뒤를 받쳐주고 있었다. 한편 가덕도 서쪽 지역의 제해권을 완전히 장악한 이순신도 이억기·원균 등과 함께 55척의 함대를 이끌고 하루 전인 7월 7일 당포에 도착해 있었다. 이때 견내량에서 당포까지 20㎞를 쉬지 않고 달려온 김천손이라는 목동이 왜선 70여 척이 견내량에 있다고 이순신에게 보고했다.

견내량은 포구가 좁고 암초가 많은 지역이었다. 이순신이 적을 유인할 생각으로 판옥선 몇 척을 견내량으로 보내자 예상대로 일본 함대가 전 속력으로 달려들었다. 일본 함대가 견내량을 거의 빠져나올 즈음, 와키사카가 주변을 살폈다. 아뿔싸! 일본 함대는 좁은 해협을 빠져나오느라 진형도 갖추지 못한 채 나란히 늘어서 추격에 만 전념하고 있었고 조선 함대는 학이 날개를 편듯한 모양의 ‘학익진(鶴翼陣)’으로 그들을 기다리고 있는 게 아닌가. 용머리를 한 정체불명의 ‘장님배(盲船·거북선)’들은 화포를 쏘아대며 돌진해오고 있었고 학 날개의 양쪽 끝도 점점 조여오고 있었다. 조선 수군이 좌우를 완전히 차단한 것이다. 거북선에 옆구리를 들이받친 배들은 가라앉거나 화염에 휩싸여 순식간에 47척이 격침되고 12척이 나포됐다. 이 해전을 후대 사람들은 ‘한산도 대첩’이라 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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