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1년 7월 2일 오전8시 쯤, 중국 길림성 장춘 교외에 위치한 만보산(萬寶山)에서 조선인 농민 200여 명과 중국인 농민 500여 명이 충돌했다. 일제의 토지조사사업으로 인해 소작농으로 전락한 조선인 농민들이 만주로 이주해 농사를 짓던 중 만보산 근처의 미개간지를 중국 정부로부터 차지(借地)한 일본인에게서 10년 기한으로 다시 불하받아 관개용 수로공사를 하고 있는 것을 중국인 농민들이 막은 것이 발단이었다.
수로공사로 인해 땅이 갈라지고 수해까지 예상한 중국인 농민들이 공사 중지를 요청한 것은 당연한 권리 행사였지만 조선인 농민들은 공사 강행을 부추긴 일본인만을 믿고 있다가 불상사를 맞았다. 다행히 큰 문제없이 해결될 수 있었던 이 사건이 한·중·일이 얽힌 복잡하고 미묘한 사건으로 비화한 것은 이 사실을 왜곡 전달한 일제의 발표를 곧이곧대로 믿은 국내 신문들이 “충돌로 다수의 조선인 사망자가 나왔다”고 과장보도하고 일본이 보복을 부채질하면서였다.
인천·평양·경성 등 각지에서 중국인에 대한 집단 보복사건이 일어나 142명의 화교가 죽고 546명이 부상을 당했다. 사건이 확대되어 국내 신문들이 진상조사에 나선 결과 사건의 배후에 중국의 주권을 무시한 일본의 모략과 과장선전이 있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일제는 이 사건을 이용, 조선인의 배일감정을 반 중국인으로 쏠리도록 하고 한·중 양국민의 공동의 적인 일제에 대한 연대의식을 약화시키려고 했다. 결국 한·중 사이의 민족감정을 자극해 두 민족을 분열시키고 만주사변을 일으키는데 이용하고자 한 고도의 계략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