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운동 뒤 일제가 문화정치를 표방하자 민족 지도자들은 조선인의 실력양성을 위해 물산장려운동과 함께 민족교육을 위한 교육운동단체를 출범시켰다. 1920년 6월 23일 한규설, 이상재 등의 발기로 출범한 ‘조선교육회’가 그것이다. 조선교육회는 사회의 근본적 개조를 위해서는 인재양성이 근본 방책임을 표방하고 시대에 적응한 교육을 장려·진흥하고자 창립됐다.
학교 증설, 조선인 교육의 차별 폐지 등을 위해 활동하던 중 1922년 2월 조선교육령이 개정돼 대학설립의 길이 열리자 ‘민립대학(民立大學)’ 설립으로 힘을 모았다. 조선교육회는 민립종합대학의 설립을 결의했지만 총독부가 교육령에 대학에 관한 규정이 없다는 이유를 들어 인가를 거부하자 1922년 11월 이상재, 이승훈, 윤치호 등 47명의 각계 인사가 서울에서 회합해 민립대학 기성준비회를 결성하고, 이듬해 3월 29일부터 3일간 1170명의 발기인 중 462명의 발기인이 서울 YMCA 회관에 참석한 가운데 민립대학기성회 발기총회를 열어 움직임을 구체화했다. ‘일본 정부가 내지인(일본인) 교육시설은 완비해놓고도 조선인 교육은 등한히 해 우민정책을 쓰므로 이제 더 이상 당국의 시책을 기다릴 것이 아니라 조선인들의 힘으로 대학을 설치하자’는 게 기성회의 목적이었다.
“한민족 1000만이 한 사람 1원씩”이라는 구호 하에 모금이 시작되고 군수와 도의원까지 포함된 각계각층의 사람들이 운동에 참여했으나 1차연도의 목표액 400만 원 가운데 100만 원도 모금되지 않고 일제도 주요 인사들을 감시하고 강연을 중지시키는 등 교묘하게 방해하는 바람에 뜻대로 진행되지는 않았다. 대다수의 문맹인구를 계몽하는 것이 급선무이지 소수의 인텔리 양성이 급하지 않다며 민립대학 설치에 부정적이었던 좌익의 태도도 운동의 활성화를 가로막은 한 요인이었다. 이 즈음 발표된 ‘경성제국 대학령’은 이 운동을 잠재우기 위한 맞불작전의 일환이었다. 결국 1927년 신간회 출범과 함께 해체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