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8년 6월 24일, 소련이 서독과 베를린을 잇는 육로를 봉쇄하는 바람에 미국·영국·프랑스가 공동 관리해온 서베를린이 자유세계로부터 고립됐다. 2차대전 후 독일은 미·영·불·소 4개국에 분할점령됐으나 소련 점령지역 내에 있는 베를린만은 공동관리 하에 있었다. 그러나 미·영·불 서방 3개국이 자신의 점령지역을 통합해 단일 경제공동체로 하고 베를린을 포함한 통합 전 지역에 새로운 통화인 마르크화(貨)를 유통시키려 하자 소련은 이를 동독 통화에 대한 위협으로 간주해 ‘베를린 봉쇄’로 맞섰다.
항공로를 제외한 베를린으로 이어지는 모든 육로·철로·수로를 봉쇄하고 식량수송까지 금지시키는 초강수였으나 미국의 방침은 정면대응이었다. 250만 베를린 시민들을 돕기위해 미국이 6월26일부터 항공기를 이용한 식량·연료·의약품 공수작전을 펼치자 소련은 7월 1일 베를린의 4개국 공동관리를 일방적으로 파기하고 베를린의 독점적 지배권을 주장하는 맞불작전으로 나왔다.
긴장이 고조되는 가운데 공수는 예정대로 진행됐고 항공기가 3분마다 베를린으로 날았다. 수송회수 만 약 20만 여회, 공수물자도 약 232만t에 달했다. 그래도 봉쇄가 장기화되자 식량은 배급제로 바뀌었고, 전력소비는 제한되었으며 공장도 하나둘 문을 닫았다. 어느덧 동독 주둔 소련군은 40개 사단으로 증가했고, 미군은 원폭 탑재기를 영국에 배치했다. 다행히 양측의 무력충돌 자제로 봉쇄는 322일만인 1949년 5월 12일 해제됐지만 독일의 분단은 더욱 고착화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