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 오늘

중국 위안스카이(원세개) 사망

위안스카이(袁世凱)의 정치적 출발점은 조선이다. 시골 향시에 두 번이나 떨어지고 건달들과 어울려다니며 망나니 노릇을 하던 그가 승승장구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조선이 자리잡고 있었다. 조선과의 첫 만남은 1882년 임오군란에서 시작됐다. 하급관료에 불과했으나 갑신정변 때 출병한 이홍장(李鴻章)과 조선 땅에서 인연을 맺으면서 앞길에 서광이 비췄다. 청의 군대를 끌여들여 동학농민혁명을 제압한 그는, 1894년 청일전쟁이 일어나기 1주일 전 귀국하면서 12년 동안 맺어온 조선과의 인연을 일단락지었다.

귀국해서도 7000명 규모의 현대식 ‘신건(新建) 육군’ 지휘를 맡아 도약의 발판을 마련했다. 1900년 의화단 사건으로 대부분의 군수뇌부들이 죽거나 몰락한 것도 그에게는 행운이었다. 1901년 11월 이홍장마저 죽어 그의 앞길에 거칠 것이라고는 아무것도 없어 보였다. 그래도 서태후의 죽음 만은 피하고 싶었다. 서태후가 죽으면 그와 악연이 있는 광서제의 친정 체제가 시작될 것이고 그렇게 되면 광서제가 그를 보복할 것이 뻔했기 때문이다.

행운의 여신은 그를 버리지 않았다. 1908년 서태후가 죽기 하루 전 광서제가 먼저 죽은 것이다. 그래도 청나라 황족과 만주족 중신들은 무식쟁이 위안스카이를 인정하지 않아 결국 푸이왕의 아버지 순친왕에 의해 모든 관직을 박탈당하고 은퇴해야 했다. 톈진에 몸을 숨기고 훗날을 도모하고 있던 1912년 3월 쑨원 등 신해혁명 세력의 도움으로 임시대총통에 올랐으나 오히려 독단과 전횡으로 혁명 세력을 무력화시켰다. 곳곳에서 ‘토원(討袁)’ 운동과 독립선언이 잇따랐지만 위안은 이들을 진압하며 1913년 10월 정식 대총통에 올랐다. 그리고는 황제 제도의 부활을 꿈꿨다.

1916년 1월 1일 마침내 황제에 올랐으나 이는 결국 ‘토원’의 불길에 기름을 끼얹는 자충수가 되고 말았다. 다시 ‘토원’ 운동이 거세게 일어나자 위안스카이의 수족들까지 황제 제도 취소를 요구하며 반발했기 때문이다. 결국 3개월 만에 황제직을 포기했으나 내리막길에는 가속도가 붙는 법이다. 만성 피로와 요독증으로 1916년 6월 6일 눈을 감았다. 이후 중국은 군웅할거시대로 빠져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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