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세기 이야기

중국 청조(淸朝)의 몰락과 원세개(위안스카이)의 실권 장악

↑ 위안스카이가 중화민국 대총통에 취임할 때 모습

 

청조가 원세개를 총리대신으로 기용한 것부터가 패착

1911년 10월 10일 중국에서 신해혁명이 성공했다. 그렇다고 해서 268년간 유지해온 청조의 사직이 금방 무너지지는 않았다. 문제는 청조의 녹을 먹으면서도 권력 냄새를 맡는 데 남다른 후각을 지닌 원세개(袁世凱·위안스카이)의 건재였다. 신해혁명으로 발등에 불이 떨어졌는데도 청조가 자신들이 쫓아낸 원세개를 총리대신으로 기용한 것부터가 패착이었다. 원세개는 “손문의 입, 황흥의 두 다리도 원세개 뱃속의 꿍꿍이는 따라잡지 못하네…”라는 노래의 주인공 답게 줄타기와 변신의 명수였다.

원세개(1859~1916)는 청조로부터 전권을 위임받은 후 신해혁명 때 혁명군에 빼앗긴 호북성의 한구와 한양을 탈환함으로써 존재감을 과시했다. 당시 그는 신해혁명 세력으로부터 청조를 무너뜨리는데 앞장서면 임시 대총통 자리를 넘겨주겠다는 제안까지 받아놓은 터였다. 그 무렵 손문은 신해혁명 성공 후 급거 미국에서 돌아와 1912년 1월 1일, 임시 대총통에 취임하고 중화민국 수립을 선포했으나 힘이 열세인 현실을 인정하고 원세개에게 손을 내밀었다. 원세개는 굳이 승산도 불분명한 내전에 깊숙이 개입할 필요가 없다고 판단해 1912년 2월 12일, 6살의 부의(溥儀·푸이) 황제를 강제로 퇴위시켰다. 이로써 1644년 이래 268년간 이어온 청조는 마침내 문을 닫았다. 진시황 이래 2100년 동안 유지해 온 중국의 황제 체제도 대단원의 막을 내렸다. 원세개는 손문이 물러난 임시 대총통 자리를 3월 10일 정식 대총통으로 차지함으로써 중국의 1인자가 되었다.

 

식민지 총독이나 된 것처럼 조선 내정에 시시콜콜 간섭

원세개는 중국 대륙 하남성 안양의 한족 명문가 집안에서 태어났다. 시골 향시에 2번이나 낙방해 무인으로 입지를 바꾼 원세개를 조선으로 끌어들인 것은 1882년 6월 조선의 구식군대가 궐기한 임오군란이었다. 흥선대원군이 8년 만에 권좌에 복귀하고 이에 불안을 느낀 민씨 조정이 청국에 진압군 파견을 요청함에 따라 청나라 광동수사 제독 오장경이 8월 20일 북양함대 군함 4척(육군 3000명 탑승)을 이끌고 남양만(화성시 송산면)에 진입할 때 군수참모 격으로 동행한 것이 원세개와 조선의 첫 만남이었다. 당시 원세개 나이 23살이었다.

원세개는 조선에서 흥선대원군을 납치해 중국 천진으로 압송하고 임오군란 세력을 소탕하는데 혁혁한 공을 세워 조선에 발을 디딘 지 석 달 만에 정5품에 제수되었다. 1884년 오장경이 청·불전쟁에 참전하기 위해 조선을 떠나면서 원세개에게 자신의 직속부대를 맡김에 따라 원세개는 조선 주둔 청군의 2인자가 되었다. 원세개는 1884년 12월 갑신정변 때도 신속한 대처로 청조 실력자 이홍장 북양대신 겸 직례총독의 두터운 신임을 받았다. 갑신정변 때 원세개는 1500여명의 청군을 이끌고 창덕궁 정문으로 들어가 200여명의 일본군을 꺾고 무력 진압했다. 결국 그의 ‘내정 간섭’으로 개화당의 자주개혁 시도는 ‘삼일(三日) 천하’로 끝났다. 1885년 10월에는 3년 전 임오군란 때 중국으로 잡혀가 천진에서 유폐 생활을 한 대원군의 귀국 호송 책임을 맡았으며 11월에는 조선의 외교통상 사무를 총괄하는 ‘주차조선총리교섭통상사의’란 전무후무한 직함을 달았다.

젊은 시절의 원세개

 

원세개는 식민지 총독이나 된 것처럼 조선 내정에 시시콜콜 간섭했다. 말이나 가마를 타고 궁궐 문을 함부로 드나들었고, 조선 정부 공식행사에선 언제나 상석에 앉았다. 고종을 알현할 때도 일어서지 않고 앉아서 맞거나 고종에게 삿대질하는 무례한 행동을 서슴지 않았다. 이처럼 원세개가 조선에서 안하무인으로 행동할 수 있었던 것은 당시 영국은 러시아의 남하를 저지하려고 청과 협조하고 있었고 일본은 갑신정변 실패 후 몸을 사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원세개는 조선 고위 관리 20명을 일거에 친청(親淸) 인사들로 갈아치워 미국공사 포크로부터 ‘무혈 정변’이라는 말을 들었다. 자신의 명의로 ‘공명호조’란 신분증을 발행, 청상(淸商)들이 조선 팔도를 누비며 조선의 풀뿌리 경제까지 들어먹게 만들고, 군함까지 내주며 인삼 밀수를 부추겼다. 위안스카이의 위세를 등에 업은 청나라 상인들의 거친 행동은 조선 사회를 완전히 흔들어 놓았다. 1886년, 청나라 상인들의 인천 해관 습격 사건이 좋은 예다. 청상이 조선 홍삼을 밀수출하려는 것을 해관에서 적발했으나, 이들은 검사를 거부하고 도리어 해관을 습격했다. 이미 갑신정변 이전에 청상회관 건설 부지의 매도를 거부한 땅주인 이범진을 폭행한 사건부터, 외상값을 요구한 광통교 약국 주인의 아들을 살해한 사건, 그리고 그 사건을 보도한 한성순보를 습격한 사건에 이르기까지 거침이 없었던 청상의 만행은 위안스카이의 세력을 등에 업고 더욱 심해졌다.

위안스카이는 재정적으로 조선을 꽁꽁 묶어두면서 외교권까지 침탈했다. 1887년 고종이 구미에 공사를 파견하려 할 때는 ▲조선 공사가 주차국에 가면 청국 공사에게 먼저 보고한 뒤 그를 경유해 주재국 외무부에 가야 하고 ▲공식 행사나 연회석상에서 조선 공사는 청국 공사 다음에 앉아야 하며 ▲중대 사건이 있을 경우 반드시 청국 공사와 미리 협의해야 한다는 이른바 ‘영약 3단’을 조선에 강제하도록 본국의 이홍장에게 제안해 성사시켰다. 그런 식으로 위안스카이는 영국 독일 프랑스 등 유럽 5개국에 조선 외교관을 파견하는 계획을 방해하고 좌절시켰다. 고종이 청 세력을 몰아내기 위해 러시아와 밀약을 체결했을 때는 고종을 폐위시키고 대원군의 장손 이준용을 국왕으로 앉힐 계략까지 꾸몄다.

‘감국대신 위안스카이’(2019년) 저자 이양자 동의대 사학과 교수는 책에서 이렇게 정리했다. “1880년대는 조선이 자주적으로 근대화 개혁을 이룰 수 있는 마지막 기회였다. 그러나 위안스카이로 말미암아 조선은 자주적인 근대화 주체의 뿌리가 통째로 뽑혔다. 조선의 주권은 무력화됐고, 경제적 속국으로 전락했고, 구미 선진국과의 외교 교섭 기회는 차단됐다. 일본의 이토 히로부미에 앞서 위안스카이가 조선의 망국으로 가는 길을 활짝 열었다.” 고종과 그의 외교고문 데니 등이 위안스카이를 면직시켜달라고 여러번 청나라에 청했지만, 그는 거꾸로 세 차례 유임되며 9년간 조선의 ‘감국대신’으로 군림했다.

 

원세개에게 힘을 실어준 것은 중국을 침탈하고 있는 제국주의 열강의 지지

조선에서 기세등등하던 원세개가 본국으로 귀국한 것은 청일전쟁 발발 1주일 전인 1894년 7월이었다. 중국으로 돌아가서는 신군(新軍)의 지휘를 맡아 정부군을 한 단계 도약시키는 발판을 마련했다. 1900년 의화단 사건으로 대부분의 군 수뇌부가 죽거나 몰락했을 때 원세개와 그의 신식 육군만이 살아남은 것은 천운이었다. 1901년 11월 이홍장마저 죽어 직례총독 겸 북양대신에 올랐으니 바야흐로 원세개의 앞길에 거칠 것이라고는 아무것도 없어 보였다. 이홍장이 죽기 전 육성한 북양군 6진은 당시 최강의 병력으로 북경 등 수도권의 요소요소에 주둔했다. 원세개는 이 가운데 2개 진만 지휘하는 위치에 있었으나 실제적으로는 북양 6진의 지휘관 모두가 그에게 충성하는 인물들이었다. 무엇보다 원세개에게 힘이 되어 준 것은 중국을 침탈하고 있는 제국주의 열강의 지지였다. 원세개는 광서제 뒤에서 수렴청정을 하고 있는 서태후에게도 수시로 뇌물을 바쳐 신임을 얻었다.

이런 그가 가장 우려한 것은 어느덧 70대가 된 서태후의 죽음이었다. 서태후가 죽으면 서태후가 유폐시킨 광서제의 친정 체제가 시작될 것이고 그렇게 되면 광서제가 그에게 보복할 것이 뻔해 보였기 때문이다. 과거 광서제의 지원을 받아 신식 군대의 실력자로 부상한 원세개였지만 1898년 광서제가 강유위, 양계초 등 개혁적 지식인들과 변법자강 운동을 벌이면서 서태후를 몰아내기 위해 쿠데타를 일으키려 한다는 사실을 서태후에 밀고해 변법자강 운동을 103일 만에 무산시켰던 악연이 두려웠던 것이다. 당시 서태후는 1898년 9월 광서제를 유폐시키고 그를 도와 변법자강에 나섰던 지식인들을 잡아들여 모조리 처형하는 ‘무술정변’을 일으켰다.

 

행운의 여신은 계속 원세개 편

다행히 행운의 여신은 원세개 편이었다. 1908년 서태후가 죽기 하루 전인 11월 14일 광서제가 먼저 죽었기 때문이다. 시중에는 원세개가 보낸 약을 먹고 광서제가 죽었다는 소문이 파다했다. 서태후와 광서제 모두 죽어 원세개의 세상이 도래하는 듯했으나 그래도 청나라 황족과 만주족 중신들은 원세개의 득세를 인정하지 않았다. 원세개는 결국 갓 2살밖에 안 된 부의 황제(선통제)의 아버지이자 섭정왕인 순친왕에 의해 1909년 1월 모든 관직을 박탈당하고 현직에서 쫓겨났다. 천진에서 칩거할 때이던 1911년 10월 10월 신해혁명이 일어난 것은 원세개에게 또 하나의 천우신조였다.

다급해진 청조는 10월 14일 원세개를 호광총독에 임명, 사태를 수습하도록 했다. 당시 원세개는 수도권의 북양군은 물론 각 성의 총독과 순무(지방관) 등에 큰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다. 외국 공사관들도 원세개가 아니면 사태를 수습할 수 없다는 입장을 견지했다. 이런 사실을 잘 알고 있는 원세개는 병이 낫지 않았다는 이유로 호광총독 취임을 거절했다. 그러면서 전방 군사 지휘권과 내각 구성권을 자신에게 달라는 등 6개 조건을 청 조정에 요청했다. 이는 사실상 자신이 내각의 수뇌가 되겠다는 속셈이었다.

청 조정이 결국 양보하자 원세개는 자신의 수하인 풍국장을 제1통령, 단기서를 제2통령으로 임명했다. 청조는 10월 27일 원세개를 흠차대신에 임명, 군대를 통솔하게 했다. 풍국장이 지휘하는 북양군은 신해혁명의 핵심 지역인 한구와 한양을 점령, 혁명군의 기세를 꺾어놓았다. 청조는 11월 1일 내각 해산을 선포하고 원세개를 내각총리대신으로 임명했다. 군대 또한 원세개가 계속 지휘하도록 했다. 그러나 원세개는 총리대신을 사양하고 북경행을 거부했다. 혁명의 위기를 이용해 청 정부로부터 권력을 받아내고 다른 한편으로는 혁명 진영 내부에서 자기편 인물을 찾아내 혁명을 조종하려는 의도였다. 이에 따라 원세개는 조정에 군대를 동원하지 말 것을 지시하고 혁명군이 지도자로 옹립한 여원홍에게는 평화적으로 사태를 해결하자며 입헌군주제를 수용하라고 요구했다.

청 조정은 원세개의 의중에 부합하는 새로운 헌법을 11월 3일 공포했다. ‘국호는 대청제국으로 한다. 황제는 신성불가침이지만 헌법이 정한 제약을 받는다. 총리대신은 국회의 추천으로 황제가 임명하고 기타 국무대신은 총리대신이 추천해 황제가 임명한다’는 내용이었다. 새 헌법은 원세개가 자신을 수뇌로 하는 내각을 구성할 수 있는 합법적 근거가 되었다. 11월 9일 국회격인 자정원이 원세개를 총리대신으로 선출하자 원세개는 더는 사양하지 않고 북경으로 올라가 내각을 구성했다. 그리고 혁명파의 양보로 1912년 3월 10일 임시 대총통에 올랐다.

 

1913년 10월 정식 대총통에 올랐으나 사실상 전권 행사하는 황제나 다름없어

원세개는 혁명 세력과 뜻을 같이하는 것처럼 행동했다. 공화제를 근간으로 하는 헌법 채택에 동의하고 1913년 2월 국회의원 선거를 실시했다. 그러나 신해혁명의 주축 세력이 결성한 국민당이 선거에서 제1당을 차지하자 1913년 3월 사실상 국민당의 당수였던 송교인의 암살을 사주하고 1913년 11월 국민당을 불법화해 의회를 해산했다. 이로써 신해혁명은 아무런 성과도 없이 실패로 돌아갔다. 원세개가 점점 독단과 전횡으로 혁명 세력을 무력화하자 반발이 뒤따랐다. 1913년 7월부터 전국 각지에서 원세개를 쫓아내자는 ‘토원(討袁)’ 운동과 독립선언이 잇따르는 제2 혁명이 시작되었으나 2개월도 안 되어 진압되었다.

1913년 10월 정식 대총통에 오른 원세개는 명목상으로만 총통일 뿐 사실상 전권을 행사하는 황제나 다름없었다. 의회 제도와 내각책임제는 취소되고 민주적 개념은 부정되었다. 2차 혁명을 진압한 뒤 장강 유역 각 성이 북양군의 손에 떨어지자 원세개는 무력으로 전국 통일을 시도했다. 남방의 비북양계 지방 군벌들에게는 매수와 무력 위협을 통해 복종과 충성의 맹세를 받아냈다.

대총통에 오른 원세개(앞줄 왼쪽에서 세 번째)와 각국 대사들(1913년 10월 10일)

 

이런 상황에서 1914년 7월 1차대전이 발발했다. 중국을 침략한 제국주의 열강은 독일과 영국 두 진영으로 나뉘어 서로 싸웠다. 그 무렵 독일은 교주만 조차지(청도)에 군대를 주둔시키고 있었고 영국의 동맹국인 일본은 언제라도 청도를 탈취할 수 있는 상황이었다. 원세개 정부는 1914년 8월 6일 중화민국의 중립을 선포했으나 일본은 8월 23일 독일에 선전포고를 하고 군대를 출동시켜 11월 7일 청도를 점령했다. 일본은 중·일 간의 현안을 해결한다는 핑계로 1915년 1월 18일 중국에 무리하고도 야만적인 요구를 제시했다. 그 유명한 ‘21개조 요구’였다. 그러면서 21개조를 받아들인다면 원세개가 황제 자리에 오르는 데 도움을 주겠다는 미끼도 던졌다. 일본이 5월 7일 최후통첩을 보내고 48시간 이내 답변을 요구하자 원세개 정부는 5월 9일 일본이 제시한 조건을 모두 받아들였다. 이로써 원세개는 매국적인 면모를 전체 중국 인민 앞에 드러냈다.

원세개는 1915년 10월 황제에 오르기 위한 ‘국민대표대회조직법’을 공포했다. 중국인은 물론 열강과 일본조차 반대했으나 원세개는 1915년 12월 황제 칭호를 사용하기 시작하고 1916년 1월 1일 중화제국의 황제로 즉위했다. 그러자 제3 혁명인 ‘토원(討袁)’ 운동이 다시 일어나 운남성·광서성 등 3개 성이 독립을 선언했다. 운남성이 호국군이라는 명칭을 사용했기 때문에 이때의 반원세개 투쟁은 ‘호국 운동’으로 불렸다. 제2 혁명 때 일본으로 망명한 손문도 1916년 4월 상해로 돌아와 토원의 고삐를 바짝 죄고 원세개의 수족들까지 황제 제도 취소를 요구하며 반발했다. 결국 원세개는 제위 83일 만인 1916년 3월 황제 제도를 취소해야 했다. 그가 통괄하던 북양군의 양대 지주인 단기서와 풍국장도 대립하는 등 북양군 내부에서도 분열이 표면화했다. 그러던 중 원세개는 1916년 6월 6일 만성피로와 요독증으로 눈을 감았다. 그가 죽고 난 후 북양 군벌은 직례파와 안휘파의 두 파로 갈라져 중국은 이른바 군웅할거 시대로 빠져들었다.

 

원세계의 후손과 국내에 남아있는 친필 들

원세개는 생전에 1처·9첩의 아내를 두었고 그들과 사이에 아들 17명과 딸 15명을 낳았다. 첩 중에는 조선인도 있었는데 둘째·셋째·넷째 첩이 조선인 오·김·민씨이고 그 사이에 7남8녀(15명)가 있었다. 위안스카이는 17세에 고향에서 결혼을 하고 1882년 조선으로 들어와서는 중국인 첩과 살았다. 조선인 첩 중에서 안동김씨 여성은 위안스카이가 29세 때인 1888년, 16세에 첩으로 들어왔다. 김씨는 조선에서 아들 둘을 낳고 살다가 위안스카이카 1894년 7월 청일전쟁 발발 직전 도망치듯 귀국할 때 따라갔다. 그때 오씨와 민씨 성의 두 몸종도 따라갔는데 위안스카이는 몸종들도 첩으로 삼았다. 김씨가 낳은 딸의 회고에 따르면 김씨는 중국에서 평생 우울증을 앓았다. 몸종 여인들이 동렬의 첩이 된 데다 중국인 첩의 학대 때문이었다.

김씨 소생 자녀들은 총명했다. 특히 둘째 아들 원극문은 일찌감치 사서오경에 통달하고 서예와 그림에도 능해 원세개의 총애를 받았다. 청년기를 보낸 북경에서는 장기와 마작에 천부적인 재능을 보이고 귀공자이자 난봉꾼으로 지내 ‘중화민국 4공자’의 한 사람으로 꼽혔다. 경극을 좋아해 ‘경극 대왕’이라는 칭호를 얻었는데 이런 모습은 훗날 영화 ‘패왕별회’에서 ‘원대인’으로 등장한다. 원극문의 아들 중 원가류는 미국에서 물리학 박사가 되었다. 원가류의 아내 즉 원세개의 손자며느리가 세계적으로 유명한 중국 태생의 물리학자 우젠슝이다. 손자며느리의 연구 논문이 몇몇 노벨 물리학상 수상자들의 연구 토대가 되고 그녀 역시 최소 7회 이상 노벨상 후보로 올라갔지만 노벨상은 수상하지 못했다. 하지만 1978년, 그 해 처음 제정된 노벨상 다음으로 유명한 울프상의 첫 수상자로 선정되었다.

현재 국내에서 원세개의 친필을 볼 수 있는 곳은 확인된 곳만 세 곳이다. 32세 때인 1891년 가을에 쓴 도봉산 망월사의 대웅전 현판, 서울 연희동 화교중학교 뒤쪽 언덕의 오장경 사당에 걸린 추모 편액, 서울 수유동 이준 열사 묘역 조형물 석판에 새겨 있는 이준 열사를 애도하는 만시(輓詩)다. 만시는 “剖胸懺血示心眞(부흉참혈시심진, 가슴을 갈라 피 뿌려 진실된 마음 보였으니)”으로 시작한다. 망월사 대웅전 현판의 편액에는 ‘光緖 辛未仲秋之月(광서 신미중추지월·1891년 가을)’과 ‘駐韓使者 袁世凱(주한사자 원세개)’라고 적혀 있다. 오장경의 시호가 무장이어서 오무장공(公)의 사당이라고 이름 지어진 ‘오무장공사(吳武壯公祠)’ 안 추모 편액에는 ‘愴懷袍澤(창회포택, 생사를 같이한 전우를 슬퍼하다)’라고 쓰여 있다. 웬세개가 전성기(총통) 때인 1912년 10월 과거 자신이 모셨던 오장경을 추모하는 내용이다.

원세개가 쓴 것으로 알려진 망월사 대웅전 현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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