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토리박스

제중원(濟衆院)은 조선 최초의 서양식 국립병원… 설립의 주역인 호러스 알렌은 어떤 사람이고 한말(韓末) 서양의학을 배운 조선인 의사들은 어떻게 양성되었나

↑ 제중원 전경

 

by 김지지

 

1883년 대미 사절단 ‘보빙사’의 미국 방문은 조선 선교의 전환점

의료와 교육을 앞세운 서양 개신교의 조선 선교에 전환점이 된 것은 1883년 민영익을 정사로 한 대미 사절단 ‘보빙사’의 미국 방문이었다. 우리 역사상 최초로 서양 문물을 체험하게 될 보빙사 일행은 일본을 거쳐 1883년 9월 2일 미국 샌프란시스코항에 입항한 뒤 대륙 횡단 열차를 타고 미국의 수도 워싱턴으로 향했다. 열차 승객들은 아메리카 원주민을 닮은 외모에 통이 좁고 속이 비치는 이상한 모자를 쓴 그들의 모습을 신기하게 바라보았다.

1883년 9월 미국에 도착한 조선의 첫 외교사절이 찍은 공식 기념사진. 정사 민영익(앞줄 왼쪽에서 두 번째)과 부사 홍영식(첫 번 째) 종사관 서광범(세 번째)이 조선을 대표하는 사절답게 관복을 입었다. 앞줄 오른쪽 끝은 미국인 로웰. 뒷줄 왼쪽부터 무관 현흥택과 최경석, 수행원 유길준 고영철 변수.

 

승객 중에는 미국 감리교의 거물급 목사 존 가우처도 있었다. 가우처는 민영익 일행과 대화를 시도했다. 조선어·중국어·영어가 뒤섞인 대화를 통해, 가우처는 조선이 미국과 새로 수교한 나라이고 조선에는 아직 개신교도가 없다는 사실을 알았다. 민영익은 조선에서의 교육과 의료를 요청했다.

재력가였던 가우처는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1883년 11월 뉴욕의 감리교 해외선교부에 조선 선교 개척비 명목으로 2000달러를 기부하면서 조선 선교를 요청했다. 미 감리교 기관지 편집자에게는 조선 선교의 당위성을 설파하는 기사를 싣게 했다. 일본에서 활동 중인 감리교 선교사 로버트 매클레이에게는 조선 선교의 가능성을 타진해보라고 편지를 보냈다. 매클레이는 1848년 중국 선교사로 파송되어 23년 간 활동하고 일본에서도 선교사업을 펼쳐 ‘아시아 감리교 선교의 개척자’로 불리던 인물이었다.

매클레이는 1884년 6월 24일 서울에 도착, 김옥균을 통해 조선 정부에 선교 가능성을 타진했다. 7월 초 학교와 병원 사업에 한 해 사업을 허락한다는 고종의 허락이 떨어지자 일본으로 돌아가 미국 감리교 해외선교부에 교육과 의료 사업을 담당할 선교사를 조선에 파견해달라고 요청했다. 그후 다수의 의료선교사들이 조선으로 파견되었다.

 

호러스 알렌은 조선 땅을 밟은 최초의 개신교 의료선교사

미국의 장로회가 젊고 의술이 뛰어난 존 헤론(1856~1890)을 조선에 파견할 의료선교사로 임명한 것은 1884년 4월이었다. 헤론이 조선으로 떠날 준비를 하고 있을 때, 중국 상해에서 의료선교사로 활동하던 호러스 알렌(1858~1932)이 조선에서 의료선교사로 활동하겠다고 본국의 장로회 선교본부에 요청했다. 허락이 떨어지자 1884년 9월 20일 제물포항으로 입국했다. 이로써 알렌은 조선 땅을 밟은 최초의 개신교 의료선교사로 역사에 기록되었다.

호러스 알렌. 오른쪽 사진 여성은 알렌의 아내다.

 

알렌은 미국 오하이오주 델라웨어에서 태어나 웨슬리언대와 마이애미 의과대를 졸업했다. 당시 미국의 대학생들 사이에는 해외 선교 열풍이 한창이었다. 알렌도 의과대 졸업 직전인 1883년 3월 미국 북장로회 해외선교부에 선교사를 지원했다. 졸업 후 의료선교사로 임명되자 1883년 10월 아내와 함께 중국 상해에 도착했다. 그런데 중국에서의 생활은 기대와는 달랐다. 서양인이라고 중국인들이 거리 한복판에서 공격하는가 하면 ‘양귀’가 지나간다며 돌을 던지기도 했다. 병원 운영도 잘 되지 않아 경제적으로 쪼들렸다. 뭔가 돌파구가 필요할 때 지인이 조선에 의사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알려주었다.

알렌은 서양인 최초이자 유일한 의사로 조선에서 크게 환영을 받았다. 특히 아내가 아프고 자신도 늙어서 의사를 필요로 하는 주한 미국공사 루시어스 푸트 공사가 반겼다. 당시 조선은 기독교 선교가 허락된 나라가 아니어서 푸트는 알렌을 미국공사관의 부속의사라고 고종에게 소개했다. 알렌은 1884년 12월 4일 일어난 갑신정변 때 치명상을 입은 민비의 친정 조카 민영익을 치료했다. 민영익이 3개월간 치료를 받고 완쾌된 덕분에 서양 의술의 우수성이 널리 알려졌다. 알렌은 고종과 민비도 치료해 서양인 최초의 ‘시의(侍醫)’로 임명되었다.

알렌이 민영익을 치료하는 모습 (출처 세브란스 역사 기록화 전시관)

 

알렌은 고종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아 서양식 국립병원을 개원했다. 병원은 갑신정변의 주모자로 살해당한 홍영식의 재동 집을 개조해 만들었다. 조선 정부는 1885년 4월 3일 새 병원에서 진료를 시작한다는 사실을 공표했다. 알렌은 4월 10일 첫 환자를 진료했다. 병원 이름은 ‘광혜원’으로 불리다가 4월 26일 고종이 하사한 ‘제중원’으로 바뀌었다.

 

제중원, 개원 1년 만에 환자가 1만 명이 넘을 정도로 성황 이뤄

제중원 개원 2개월 후 젊고 의술이 뛰어난 존 헤론이 입국, 제중원에 파견되었다. 헤론은 영국에서 목사 아들로 태어나 1870년 미국으로 이주했다. 테네시주 메리빌대를 졸업하고 4년 동안 교사로 근무하다가 테네시 의과대에 다시 들어가 1883년 졸업했다. 18개월 동안 개업의로 활동하고 뉴욕 의과대에서 1년 동안 수련을 받았다. 그러다가 1884년 4월 미국 장로회에 의해 조선에 파견될 선교사로 임명되어 1년이 지난 1885년 6월 20일 제물포에 도착했다.

헤론은 의과대를 수석으로 졸업한 사람답게 뛰어난 의술과 이상적인 선교의사로 칭송을 받았으나 선교 방식에 대한 노선 차이 때문에 알렌과 틀어졌다. 알렌이 조선에서 기독교를 허용하지 않는 현실적인 여건을 감안해 직접적인 선교 사업을 지양하고 의료 사업을 통한 간접 선교에 치중한 반면 헤론은 직접 선교를 고집했기 때문이다. 그래도 초창기 의료선교사들의 노력 덕에 제중원은 개원 1년 만에 환자가 1만 명이 넘을 정도로 성황을 이뤘다.

존 헤론

 

알렌은 조선 최초의 서양의학 교육기관인 의학교도 제중원 안에 설치했다. 교수진은 알렌, 헤론, 언더우드로 구성했다. 1886년 3월 29일 경쟁 시험을 통해 선발한 16명의 학생으로 개교하고 7월에는 12명이 본과생으로 결정되었다. 하지만 학생 대부분이 중도에 포기하거나 졸업한 학생들도 관료로 빠져 전문의사를 배출하지는 못했다. 학교는 그래도 명맥을 유지하다가 1890년 7월 26일 헤론이 이질에 걸려 34세의 젊은 나이로 숨지면서 사실상 중단되었다. 제중원은 환자가 많아지고 학생들을 가르칠 공간도 부족해지자 1886년 가을 지금의 을지로 입구인 구리개로 확장·이전했다.

알렌은 1887년 11월 초대 주미공사 박정양을 수행하는 서기관으로 임명되자 선교사직을 사임하고 박정양을 따라 미국으로 건너갔다. 1889년 9월 조선으로 돌아와 다시 선교사로 활동하다가 1890년 7월 주한 미국공사관의 서기관으로 임명되면서 의료선교사직을 완전히 그만두었다.

제중원과 고종의 시의 역할은 헤론이 이어받았으나 헤론이 1890년 7월 갑자기 숨져 알렌은 제중원과 공사관 업무를 병행했다. 그러다가 1890년 11월 주한 미국 부총영사로 임명되어 외교관으로만 활동했다. 이후 1897년 7월 주한 미국공사 겸 총영사, 1901년 6월 주한 미국 특별전권공사 등 핵심 역할을 맡았다가 을사조약이 체결되기 전인 1905년 3월 해임되었다. 1905년 6월 9일 조선을 떠나고 1932년 12월 11일 미국에서 타계했다.

알렌은 이처럼 조선에 서양식 병원을 설립하고 조선에 서양의학을 도입함으로써 조선의 의술을 한 단계 발전시켰다는 평가를 받지만 긍정적 평가만 있는 것은 아니다. 1895년 운산금광 채굴권, 1896년 경인철도 부설권을 따내 미국의 사업가와 일본에 넘겨 거액의 차익을 챙겼다는 비판 때문이다.

제중원의 공백 상태는 1891년 4월 찰스 빈턴이 제중원의 책임을 맡으면서 해결될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빈턴이 부임한 지 한 달 만에 조선 정부에 제중원 운영비의 사용 권한을 요구하며 진료를 거부하고 조선 정부가 이를 인정하지 않으면서 또다시 파행이 빚어졌다. 더구나 빈턴은 진료와 선교 활동의 병행을 원했다. 평소 의료 사업보다는 직접 선교의 필요성을 강조해온 그로서는 제중원에서 공개적으로 선교 활동을 할 수 없는 현실이 불만스러웠다. 빈턴은 1891년 7월 제중원에 복귀했지만 업무를 소홀히 해 제중원은 유명무실하게 운영되었다.

 

제중원 운영권, 1894년 9월 미국 북장로회로 이관돼

제중원이 다시 제 구실을 하게 된 것은 1893년 11월 올리버 에이비슨(1860~1956)이 제중원 책임자로 부임하고부터였다. 에이비슨은 영국에서 태어나 1866년 가족을 따라 캐나다로 이주, 1884년 토론토의 온타리오 약학교와 1887년 토론토 의과대를 졸업했다. 토론토 시내에서 개업의로 활동하면서 해외 선교에 관심을 갖고 있을 때 조선에서 활동하던 언더우드가 미국으로 돌아왔다는 소식을 들었다. 에이비슨은 1892년 9월 언더우드를 토론토로 초청해 만난 뒤 조선 선교의 결심을 굳혔다. 그는 캐나다 감리교회에 선교사 파송을 요청했지만 응답이 없자 미국 북장로회 선교부로 발길을 돌렸다. 에이비슨은 1893년 캐나다 밴쿠버를 떠나 7월 16일 부산에 도착했고 언더우드의 권유로 1893년 11월 1일 제중원의 책임을 맡았다.

올리버 에이비슨(왼쪽)과 루이스 세브란스

 

당시 제중원의 상태는 여러모로 한심했다. 병실이 없으니 환자가 없었고 기구와 약품도 보잘 것 없었다. 다행히 에이비슨의 노력으로 환자 수가 늘어났다. 하지만 여전히 예산은 제대로 집행되지 않고 병원의 미래도 어두워 계속 제중원 일을 해야할 지 혼란스러웠다. 결국 에이비슨은 제중원을 떠나겠다고 조선 정부에 통보했다.

조선 정부가 해결책을 제시하자 이번에는 “제중원 운영에 관한 모든 권한을 넘겨 달라”며 “제중원 개조 비용과 운영비는 미국 북장로회가 부담하겠다”는 뜻을 전달했다. 이렇게 되면 조선 정부는 단지 건물주로만 존재할 뿐 제중원의 운영에 간여할 여지가 없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도 조선 정부는 동학농민운동과 청일전쟁 등으로 인한 재정 악화로 더 이상 제중원을 지원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1894년 9월 26일 에이비슨의 조건을 받아들였다. 이로써 제중원의 운영권은 미국의 북장로회로 이관되었다. 또한 그동안 제중원에서 금지된 선교 활동도 자유롭게 할 수 있게 되어 명실상부한 선교 병원으로 탈바꿈했다.

에이비슨은 1899년 3월 고국으로 안식년 휴가를 떠났다. 캐나다에서 건축가 헨리 고든에게서 병원 설계도면을 기증받고 1900년 4월 미국의 실업가 루이스 세브란스에게서 1만 달러의 거금을 지원받았다. 그리고 1900년 10월 조선으로 돌아와 세브란스가 추가로 보내준 5,000달러를 더해 추수감사절인 1902년 11월 27일 서울역 앞 복숭아골(현재 연세대 재단빌딩 자리)에서 병원 신축을 위한 정초식을 거행하고 1904년 9월 23일 병원 봉헌식을 열었다. 이로써 입원실 규모가 40병상인 우리나라 최초의 현대식 종합병원인 ‘세브란스 기념병원’이 문을 열었다. 첫 수술은 1904년 10월 4일 ‘빛으로 인도한다’는 의미로 백내장 환자를 대상으로 실시했다. 구리개 제중원의 부지와 건물은 조선 정부에 반환하는 것으로 1905년 4월 3일 약정했다. 제중원이 설립된 지 정확히 10년 만이었다. 정부는 돌려받은 제중원을 더 이상 병원으로 사용하지 않아 제중원은 역사 속으로 퇴장했다.

서울역 앞 세브란스병원 (1904년)

 

조선 최초 의사는 세브란스 졸업생 아니라 ‘관립의학교’ 졸업생

세브란스병원에서 첫 졸업생이 배출된 것은 설립 후 4년이 지난 1908년이었다. 김필순·김희영·박서양·신창희·주현칙·홍석후·홍종은 등 7명이 그 주인공으로, 이들은 6월 4일 조선 최초의 의사 면허에 해당하는 ‘의술 개업인허장’(1~7호)을 수여받았다. 이 중 박서양은 당시 조선 사회에서 최하층으로 취급받던 백정의 아들이어서 특히 세간의 주목을 끌었다. 박서양은 모교의 전임 교수로 발탁되어 화학과 해부학 등을 가르치며 외과 환자를 진료했다. 그러다가 돌연 두만강 건너 간도로 이주해 구세병원과 숭신학교를 세우고 간도 지역의 조선인 자치기구이자 독립운동 단체인 ‘대한국민회’에서 군의(軍醫)로 활동했다.

제중원 의학교(세브란스병원의학교) 1회 졸업생들. 김필순, 김희영, 박서양, 신창희, 주현측, 홍석후, 홍종은이다.

 

세브란스병원 졸업생이 ‘의술 개업인허장’을 최초로 받았다고 해서 그들이 조선 최초의 의사는 아니었다. 대한제국 정부가 1899년 설립한 ‘관립의학교’에서 3년간 서양의학을 공부한 방한숙·유병필·김교준 등 제1기생 19명이 1902년 7월 4일 졸업시험을 통과했기 때문이다. 다만 1기생은 부속병원이 없어 임상실험을 하지 못하다가 1902년 8월 겨우 병원이 완공되어 뒤늦게 임상실험을 한 뒤 1903년 1월 9일 졸업식을 치렀다.

‘관립의학교’는 1899년 3월 24일 대한제국 정부가 관제를 정하고 9월 개교한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식 정규 의학교육기관이다. 조선인 중에 서양의학을 체계적으로 공부한 사람이 드물어 교사는 김익남 등 일부 한국인을 제외하고 대부분 일본인이었다.

당시는 졸업만 하면 별도의 ‘의술 개업인허장’ 없이 의사 자격과 개업 권리를 인정받았다. 따라서 세브란스 졸업생이 의사 인허장을 최초로 받은 것은 맞지만 한국 최초의 의사는 관립의학교 졸업생이다. 관립의학교는 1903년 제2기생 13명, 1905년 제4기생 4명을 더 배출했다. 이들은 졸업 후에도 마땅한 일자리가 없어 대개는 군의관으로 근무했다. 참고로 한국인 최초의 의사는 1893년 미국에서 의사가 된 서재필이다. 최초 여의사는 1900년 미국에서 의사가 되어 국내에서 활동한 박에스더이다. 일본 유학 출신 의사들도 더러 있었다. 김익남도 그중의 한 명이었다.

박에스더(왼쪽)와 서재필

 

서울대병원과 연세대 세브란스병원, “우리가 제중원의 적통”이라며 경쟁 중

대한제국 정부는 제중원의 운영권을 1894년 미국 북장로회로 이관한 뒤 1899년 4월 대한제국 내부 직할 병원으로 ‘내부병원’을 설립하고 1900년 7월 ‘광제원’으로 개칭했다. 대한제국 정부는 또한 1905년 대한적십자사를 창립하고 그해에 적십자병원을 설립했다. 일제는 1907년 3월 관립의학교, 광제원, 적십자병원을 합쳐 ‘대한의원’으로 통합하고, 1908년 5월 대한의원 건물을 지금의 서울대병원 구내에 준공했다. 대한의원은 한일합방 후인 1910년 9월 ‘조선총독부 의원’으로 개칭되어 오늘날의 서울대병원으로 맥을 이어가고 있다. 서울 재동의 제중원 병원 부지는 경기여고(1910~1945), 창덕여고(1949~1989)를 거쳐 1993년부터 헌법재판소로 사용되고 있다.

오늘날 서울대병원과 연세대 세브란스병원은 자신이 제중원의 적통이라며 경쟁하고 있다. 세브란스병원은 제중원이 알렌의 요청으로 만들어졌고, 이후 조선 정부로부터 운영권을 이양받은 미국 북장로회 선교회가 세브란스로부터 거액을 기부받아 현재 세브란스병원을 설립했다는 점을 들어 자신이 제중원을 계승했다고 주장하고 있다. 반면 서울대병원은 제중원이 고종의 재가를 받아 설립되고 조선 정부가 건물 부지와 예산 등을 부담한 ‘국립병원’이란 점에서 오늘날 국립대병원을 대표하는 서울대병원이 진짜 계승자라며 맞서고 있다.

이 때문에 서울대병원은 고종이 백성에게 근대병원 설립을 알리는 방문(榜文)을 붙인 4월 3일을 제중원의 시작으로 보고 있는 반면 세브란스병원은 환자 진료를 시작한 4월 10일을 제중원 설립일로 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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