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에서 ‘보천보 전투’는 김일성의 무장항일 투쟁사 가운데 가장 상징적인 사건으로 평가받고 있다. 따라서 ‘보천보(普天堡)’라는 이름이 붙여지면 그만큼 중요성을 인정받는 뜻이 된다. ‘휘파람’이라는 히트곡과 전혜영이라는 대중스타를 배출한 악단도 보천보전자악단이고, 북한에서 가장 큰 기념탑도 높이 49m, 길이 60m의 보천보전투기념탑이다.
전투는 1937년 6월 4일 시작됐다. 보천보는 백두산맥 남서쪽 끝자락에 위치한 곳으로 해방 이전에는 함남 갑산군에 속했다가 지금은 대부분이 양강도 삼지연군에 속해있는 곳이다. 하루 전 압록강을 건너 보천보 뒷산 곤장덕에서 날을 샌 동북항일연군 제2군 6사 병력 100여 명이 함남 갑산군 조국광복회원 80여 명의 지원을 받으며 갑산군 내 주요 시설을 급습한 것은 밤 10시 무렵이었다. 당시 보천보는 일본인 50여 명과 조선인 1300여 명이 거주하고 있는, 경찰도 6~7명만이 근무하는 작은 시골도시였다.
전투가 벌어졌지만 경찰은 한명도 죽거나 다치지 않고 민간인 2명만이 유탄에 맞아 죽었을 정도로 일방적이고 싱거운 전투였다. 그러나 일본 경찰 주재소와 면사무소, 우체국 등을 파괴·방화하고 다량의 무기와 탄약을 노획한 뒤 밤늦게 떠난 유격대 뒤를 일본 국경경비대가 쫓으면서 양측에서 수 십명의 사상자가 나왔다. 훗날 북한 정권의 핵심 인사가 되는 최용건과 님 웨일스의 ‘아리랑’에 나오는 김산 등도 이 전투에 참가한 것으로 알려졌다.
전투 소식이 6월 5일자 동아일보 호외를 통해 국내에 상세하게 알려지면서 1931년 만주사변 이래 내세울만한 독립운동 소식을 접하지 못한 국내의 대중들 가슴 속에는 독립에 대한 희망이 꿈틀거렸다. 패배주의에 빠져있던 대중들에게 독립에의 꿈이 되살아 난 것이다. 호외에는 김일성 장군의 이름이 선명했다. 전투 후 일제는 조국광복회 회원 739명을 체포하는 등 국경지대 항일운동을 대대적으로 탄압하면서 1930년대 민족해방운동 사상 최대의 검거 선풍을 일으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