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년7개월간의 군정기간을 보내고 1963년 12월에 비로소 대통령에 취임한 박정희 대통령이 첫 대규모 난관에 봉착했다. 이승만 정권 때 시도했으나 구보타 망언으로 중단됐던 한·일간 국교수립을 서두른 것이 화근이었다. 구악(舊惡) 일소를 내세우면서 신악(新惡)을 양산한 것도 반발을 부채질했다. 야당을 중심으로 ‘대일 저자세외교반대 범국민투쟁위원회’가 결성되고 전국의 대학생들이 매국적인 한·일회담 반대를 외치면서 정국은 혼미 속으로 빠져들었다. 타의였지만 5·16후 자취를 감췄던 대규모 시위가 다시 시작됐다.
1964년 3월 24일, 서울대 문리대생 500여 명이 거리로 진출한 것을 신호탄으로 각 대학 학생들도 거리로 뛰쳐나왔다. 이때부터 6월 3일까지 전국의 대학가는 최루탄 연기와 곤봉, 널브러진 돌덩이들로 아수라장이 됐다. 정부는 유화적인 자세로 사태 확산을 막아보려했지만 학생들이 단식농성을 하는 등 강도를 점점 높여나가자 정부는 강경책으로 선회했다. 6월 3일 시위가 절정에 이른 이날, 국회의사당에서 청와대에 이르는 길은 수 만명의 학생과 경찰로 뒤덮였다.
사태가 4년 전의 4·19를 방불케 하는 상황으로 치닫자 정부도 분주하게 움직였다. 경찰을 군인으로 교체하고 국가안전보장회의가 소집됐으며 주한 미 대사와 유엔군사령관도 대책을 협의했다. 오후 9시40분, 마침내 오후 8시를 기준한 계엄령이 서울시 전역에 선포됐다. 계엄은 55일 뒤인 7월 29일 해제됐지만 1120명이 검거되고 348명이 구속됐다. 이때 반정부 시위를 주도했던 세대를 학생운동사에선 ‘6·3세대’라고 부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