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7년 서독. 젊은이들의 베트남전 반대 시위가 갈수록 격화되고 있었다. 특히 ‘최전방 도시’ 베를린은 다른 도시에 비해 그 정도가 심했다. 1967년 6월, 팔레비 이란 국왕이 서베를린을 국빈 방문하자 학생들은 반민주적인 독재자 팔레비의 방문을 허용하려하지 않았다. 6월 2일 팔레비 부부가 오페라 ‘마적’을 감상하기 위해 도이치 오페라하우스를 찾았을 때 학생들은 극장 밖에서 반대 시위를 벌였다. 도로는 수천명의 학생들로 뒤덮였고 저지선은 이미 뚫려 있었다.
저녁 8시가 되자 극장 밖에서 전쟁같은 상황이 벌어졌다. 갑자기 시위대를 향해 돌진한 경찰이 곤봉으로 내리치면서 시위대 한가운데를 뚫고 들어온 것이다. 학생들이 우왕자왕하는 틈을 타 사복경찰이 주모자 색출에 나섰다. 베를린자유대생 벤노 오네조르크(26)도 달아났다. 그러나 갑자기 어둠 속에서 경찰의 곤봉이 날아들어 그를 쓰러뜨렸고, 수명의 경찰이 달려들어 마구 두들겨팼다. 그때 한발의 총알이 오네조르크 뒷머리를 관통했다. 서독 사회를 뿌리채 뒤흔들어놓을 총성이었다.
청년은 그 자리에서 죽었으나 베를린시 정부와 경찰은 거짓으로 일관하다 하루가 지나서야 경찰의 발포 사실을 인정했다. 그러나 경찰이 쓰러진 상태에서 칼로 위협당해 자신을 방어하기 위해 발포한 것이라고 발표하고, 베를린 시장이 대학생의 죽음을 시위학생들이 책임을 져야한다고 발언함으로써 학생들의 분노를 촉발시켰다. 시위 물결은 베를린 담장을 넘어 서독 전역으로 번져갔고 정부와 경찰은 수세에 몰렸다. 학생들의 시위에 부정적이었던 언론도 점차 경찰의 과잉진압을 규탄하는 쪽으로 기울었다.
결국 사건을 둘러싼 지루한 공방전 끝에 그해 9월 베를린 시장과 경찰총장이 물러남으로써 진실은 학생들의 손을 들어주었다. 발포 경찰은 무죄판결을 받았다. 이 사건을 계기로 학생들의 시위는 저항으로 발전했고, 낡은 대학정책과 권위적인 교수들에 대한 비판이 대학의 담을 넘어 사회쟁점으로 등장했다. 독일 68혁명의 진정한 출발을 알리는 신호였고, 이듬해 유럽 전역에 몰아칠 68혁명의 예고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