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 오늘

혁신계 신문 ‘민족일보’ 강제 폐간

1961년 5월 19일, 4·19 혁명 후 혁신세력의 급속한 성장에 맞춰 평화통일론과 남북협상론을 기치로 내걸었던 혁신계 신문 ‘민족일보’가 지령 92호를 끝으로 폐간됐다. 발행인 조용수는 하루전 구속됐다. 조용수는 6·25 때 일본으로 건너가 4·19가 일어나던 그 해 6월에 귀국한 재일 거류민단의 간부 출신이었다. 그는 4·19 후 한국정치의 새로운 가능성을 발견하고 혁신정당인 사회대중당 후보로 7·29 총선에 뛰어들었으나 고배를 마시고 1961년 2월 13일 민족일보를 창간했다.

민족일보는 불과 석달 남짓만에 발행부수가 당시 선두권이었던 동아일보에 근접했고 특히 가판은 다른 일간지들을 제치고 1위에 오르는 돌풍을 일으켰다. 그러나 진보적인 논지 탓에 국회에서 조총련계 자금 유입설을 둘러싸고 설전이 벌어지고 있을 때 일어난 5·16은 조용수에게는 치명적이었다. 반공을 국시로 내세운 5·16 세력이 조용수를 희생양으로 삼은 것이다. “국민을 선동해 북한을 고무동조하고 조총련계 간첩 이영근으로부터 공작금을 받아 민족일보를 창간했다”는 게 혐의 내용이었다.

국제언론인협회(IPI)와 국제펜클럽, 국내외 문인 언론인 100여 명까지 나서 구명운동을 벌였지만 혁명재판부는 조용수에게 ‘특수범죄처벌에 관한 특별법 위반’을 들어 사형을 선고하고 최고회의가 이를 추인했다. 그리고 12월 21일, 조용수는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사형이 집행되기 까지에는 불과 30시간 남짓. 당시 조 사장의 나이는 32세에 불과했다. 언론인이 사형을 당한 것은 일제 때도 없었던 초유의 일이었다. 조용수는 “조국을 위해 좀더 일하지 못한 것과 (신문창간을 위해 차입한) 돈을 갚지 못한 것이 안타깝다”는 말을 남기고 눈을 감았다. 그러나 간첩이라던 이영근이 민단계고 1990년에는 국민훈장까지 추서됐다는 사실이 나중에 밝혀져 그의 죽음을 둘러싼 논란은 지금까지도 계속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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