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차대전 발발과 함께 일본이 중국 산동성 내 독일 조차지 칭다오(靑島)와 자오저우만(膠州灣)을 점령해도 전쟁으로 경황이 없는 유럽 열강들은 일본의 움직임을 그냥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일본의 대륙침략 야욕이 구체적으로 드러난 것은 1915년 1월 18일이었다.
그날 저녁, 주중국 일본 공사가 위안스카이(袁世凱) 대총통을 찾았다. 그는 외교 관례도 무시한 채 전함과 기관총 무늬를 넣은 서류 몇장을 위안스카이에게 건넸고, 서류에는 악명높은 ‘21개조 요구’가 적혀 있었다. 중국이 정상적인 국가였다면 감히 꺼낼 수 없는 강압적인 요구였다. 일본이 특히 중시한 것은 남만주와 동부 내몽고의 독점 지배를 둘러싼 조항이었다. 러일전쟁으로 획득한 여순·대련의 조차가 1923년에 만료되고 남만주철도도 중국이 매입하겠다고 나서면 1939년 이후에는 이를 거부할 명분이 없는 일본으로서는 기한을 다시 99년간 연장할 것을 요구했다.
위안(袁)은 “중국을 개·돼지처럼 취급하느냐”고 분노를 터뜨리며 한편으로는 열강의 지원과 중국 민중의 분노가 폭발할 것을 기대했다. 조직적이지 않고 끈질기지 못했을 뿐, 중국인들의 분노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일본은 이에 아랑곳하지 않고 5월 7일 위안에게 이틀간의 말미를 주며 최후통첩을 보냈다. 뒤늦게서야 열강의 원조를 기대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알게된 위안은 결국 5월 9일 모든 조건을 수락하겠다는 의사를 표명하고 5월 25일 조약을 체결했다. 중국인들의 분노는 절정에 달했다. ‘국가의 치욕을 잊지말자(毋忘國恥)’는 현판들이 곳곳에 나붙고 일본상품 불매운동이 전국적으로 확산됐으며 일본인과 일본 영사관에 테러가 가해졌지만 힘없는 자의 공허한 외침일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