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1년 7월 시작된 휴전회담이 2년이나 지속된 것은 포로 때문이었다. 유엔군 측이 발표한 북한군 포로는 13만 2400여명(중공군 포로 2만700명을 포함)이었고 북한 측이 발표한 유엔군 포로는 이미 평양방송을 통해 주장했던 6만 5000여명에 훨씬 못미치는 1만 1500여명(유엔군 4400여명 포함)이었다.
문제는 포로 송환이었다. 유엔군 측이 인도주의적인 점을 강조한 자유송환 즉 원하는 포로만 북한으로 보낸다는 입장이었던 반면 북한 측은 1949년 제네바협정이 규정한대로 자동송환 즉 모든 포로를 북한으로 송환하라는 주장을 폈다. 결국 북으로 송환되기를 원하는 포로가 7만여명 뿐이라고 유엔군측이 북한에 통보하면서 회담은 교착 상태에 빠졌다.
거제도에 수용돼 있던 포로들도 친공·반공포로로 갈려 유혈사태를 빚고 있었다. 더구나 북한 측은 공작원들을 포로로 잠입시켜 수용소 내 친공포로들을 배후 조종하며 반공포로들을 대상으로 협박과 테러를 일삼았다. 이로 인해 크고작은 폭동이 빈발하던 1952년 5월 7일, 거제도 제76포로수용소장 도드 준장이 친공포로들에게 납치·감금되는 포로사상 전무후무한 일이 발생했다. 수용소 철조망 밖에서 포로들과 면담을 하던 중 치밀하게 준비된 친공포로들의 계략에 의해 수용소 안으로 끌려가 납치된 것이다. 후임소장 콜슨이 포로들의 요구를 상당부분 수용하고 도드 역시 미군의 잔학행위를 시인함으로써 도드는 나흘 만에 석방됐지만 이로인해 도드는 대령으로 강등되는 수모를 겪어야 했다.